석모도 민머루해변에서
겨울의 태양은 여름과 다르다. 하늘 높은 곳에서 지상의 모든 것을 지배하듯 수직으로 내리꽂는 대신, 비스듬히 몸을 뉘어 낮게 땅을 비춘다. 그 겸손한 고도 덕분일까 - 하늘의 푸른 여백은 더 넉넉하게 남고, 언 땅 위 군데마다 얼어붙어 하얗게 센 얼음들은 투명한 반사판이 된 까닭에 눈부시게 부서진다.
추위에 모두가 종적을 감춘 거리의 공허함은, 역설적이게도 광활한 푸른 하늘과 대비되어 홀로 걷는 나그네에게 깊은 사유의 시공간을 안겨준다. 길 위에서 문득 텅 빈 겨울 바다가 떠오를 때는, 시퍼런 너울이 넘실거리고 힘찬 파도가 모래사장을 어루만지는 동해보다도, 밀물과 썰물이 오갈 때마다 윤슬 아래 감춰두었던 수줍은 갯벌이 조용히 모습을 드러내는 서해 어느 끝자락 해변의 모습이 더 선명하곤 했다.
어느 일요일 오전, 식어가는 커피 한 잔을 뒤로하고 무작정 길을 나섰다. 인적이 드문 곳으로, 인적이 드문 시간을 향해. 48번 국도를 달려 강화도에 닿아 내친김에 섬 속의 섬 석모도까지 미끄러지듯 향했다. 그 섬의 유일한 해변, 민머루해변까지.
오늘 해가 서서히 저물던 텅 빈 해변에 부는 짠내 나는 바닷바람을 맞고 짠내 나던 고독이 씻겨 날아간다. 끝 모를 갯벌의 굴곡진 웅덩이마다 비스듬한 겨울볕이 내려앉아 수만 개의 거울처럼 반짝였다. 광활한 무채색의 물빠진 바다 앞에 서면 세상의 소음은 저 멀리 밀려나고 텅 빈 곳에 비로소 나는 채워진다. 겨울 바다의 고요한 위로에 그다지 시리지 않다.
몇 년 전 겨울에도 친구들과 이곳을 찾았었지. 언 땅 위 시린 바람을 맞으며 나누었던 종이컵 속 위스키 한 잔. 깊어지는 밤을 따라 진지함이 차오르는 건 영 낯간지럽고 남사시러워서, 그리고 그런 건 굳이 말로 꺼내지 않아도 되는 것이라며, 우린 분명 취기에 젖어 장난기 가득한 얘기들로 밤을 샜겠지. 대체 어떤 실없는 소리에 그때의 우리는 그토록 즐거웠을까. 지난날의 짙은 추억은 시린 공기 속에서도 하얗게 피어오르는 오늘의 낭만을 살려낸다.
시린 겨울에는 이렇듯 광막한 시공간에 흩어져 있는, 내게만큼은 빛나는 조각들을 하나둘 맞추어본다 - 선명한 겨울 하늘과, 관자놀이를 뭉근하게 비추는 석양, 투박한 갯벌과 그 위를 덮는 지난 날의 기억들. 마치 두꺼운 이불을 감싸고 따뜻하게 데워진 온돌방 위에서 퍼즐을 맞추듯 온기를 소중히 여기며 오늘을 오롯이 지내다 보면,
겨울은 생각만큼 시리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