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은사에 홍매화가 활짝 핀 날에
고민이 고민을 낳고, 번뇌가 번뇌에 기대어 자라는 계절이었다. 생각이 많은 사람에게 겨울은 더 길다. 바깥이 얼어붙으면 안쪽도 따라 굳기 마련이어서, 머릿속에서 한 바퀴 돌고 온 생각이 다시 제자리에 와 앉는 일을 나는 몇 번이고 반복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이 되어가고 있는지. 그런 물음들이 한 겹씩 쌓여 하나의 무게가 되었다.
별일 없던 어느 날 점심을 먹고 나와 코엑스의 높은 빌딩들을 뒤로 하고 봉은사의 일주문을 지났다. 일주문을 지나면 어느 순간 기운이 바뀐다. 도심 한복판에 자리한 이 절은 늘 그 경계가 묘하다. 한 발짝 전까지 울리던 클랙슨 소리가, 일주문을 지나는 순간 종소리처럼 먼 데로 물러난다.
그날은 절 안이 화사했다. 석가탄신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경내 곳곳에 연등이 빼곡하게 걸려 있었고, 아직 불이 들어오지 않은 낮의 연등들은 바람에 가볍게 흔들리며 제각기 다른 소원을 품고 있었다. 분홍, 초록, 노랑. 형형색색의 연등이 하늘과 처마 사이를 메우고 있는 풍경은, 절이라기보다는 축제의 전야 같았다. 종종 오는 봉은사지만 늘 이 시기부터는 분위기가 기쁨으로 달라진다.
사람들이 한데 멈춰 있는 곳은 홍매화나무 아래였다. 이곳 봉은사의 홍매화는 봄이 올 때마다 가장 먼저 꽃을 피운다. 딱 한 그루의 나무지만 꽃봉오리가 흐드러져 자태가 곱다. 백매화의 단아한 품격과는 다른, 거침없이 선명한 분홍. 겨울 내내 회색과 검정에 길들여진 눈을 쿡 찌르는 것 같은, 갑작스러지만 기분 좋은 감각의 전환.
매화는 겨울을 통과한 나무만이 피울 수 있는 꽃이라고 한다. 추위를 견딘 시간이 꽃잎의 채도가 된다면, 이 홍매화는 꽤 긴 겨울을 보냈을 것이다.
그러니 매화처럼 버티어 온 나도 이 봄의 분홍빛을 살며시 품어봐도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