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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초 Nov 21. 2023

소심해서 진상이 될 뻔했네

#도덕적으로 불완전한 사람입니다 #소심한진상

점심 무렵, 카페에 가서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날씨는 추웠지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멈출 수는 없었다. 에너지 부스터에 가까운 음료를 습관적으로 주문한 상태로 멍하니 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카운터에 혼자서 일하는 직원은 내 또래로 보였다. 밀려드는 주문에 당황한 듯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서 뼈가 시릴 듯한 각얼음이 둥둥 떠있는 아메리카노 대신 뜨거운 커피 한 잔이 나왔을 때도 그 분주함 때문이겠지 싶었다.


 "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었는데요."

 "아, 그러세요. 어떡하지..."


내 뒤로도 주문이 쌓여가고 있었고, 점심 식사 후의 피크 타임을 한 명이서 감당하는 와중에 동선이 한 번 꼬이게 되는 것도 힘들겠지.


 "많이 바쁘신 것 같은데 그냥 먹을게요. 힘내세요."


그래서 나는 호의를 베풀었다. 직원도 감사하는 눈치길래 웃으면서 하루 좋은 일했다고 넘기기로 했다. 그런데 잠시 뒤 화장실을 찾다가 실수로 카운터 뒤쪽으로 다가갔던 모양이다. 화장실 안내판의 표지와 주문받는 카운터 너머의 직원용 이동공간이 교묘하게 엇갈려있는 인테리어였다. 그런데 그 순간 방금 전만 해도 감사해하던 직원이 누구보다 냉랭한 목소리로


 "그쪽으로 들어가시면 안 돼요!"


라고 소리치는 것이다. 물론 당연히 주방 쪽은 들어가면 안 되는 공간인 것은 맞지만 순간적으로 놀라서 눈물이 핑 돌아 괜히 억울해지는 것이다. 


 '아니, 나는 호의를 베풀었는데 왜 저 사람은 저렇게 냉정하지. 저렇게 말할 것까지는 없잖아. 누가 봐도 진상인 것도 아닌데!'


하고 속으로 씨근덕거리면서 기분이 상한 상태로 카페를 나왔다. 그리고 한참 동안 그 일에 대해 생각했다. 잘잘못을 속으로 재어 보면서 누가 과연 옳은 건지 따져보기까지 했다. 일부러 그 행동을 한 것이 아니며, 비슷한 실수로 빚은 사건에서는 명백히 내가 양해해 주었음에도 오히려 소리를 지르다니. 내가 과민반응을 하는 걸까? 이렇게 반응하는 내가 진상이고 민폐인 걸까? 하고 생각하면 할수록 나는 오히려 직원의 반응을 과장해서라도 내가 옳다고 증명하고 싶어져 갔다.


 그러다가 상담선생님이 해준 말이 기억이 났다. 지난 <자아존중감 회복하는 법>이란 글에 썼듯이 심한 긴장과 불안, 그리고 무기력의 근본은 나를 존중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나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나의 감정을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혼자서라도 적극적으로 감정을 표현하고 수용하면 그게 힘이 될 거란 말이었다. 


 이 일과 전혀 관계가 없는 듯 보였지만 순간적으로 그게 떠오르자 연달아 '아 나 속상했구나. 그리고 섭섭했구나.'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자 더 이상 그 일로 끙끙대지 않게 되었다. 직원의 행동에 이해 당혹스럽고 서운해진 일은 잠깐이었고 오히려 그런 내 감정을 누가 봐도 합리적인 것으로 증명하고 싶어서 그때 소리 지른 일을 목소리부터 표정까지 하나하나 분석하면서 오래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나는 속상했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섭섭했다. 왜 섭섭한 감정을 느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는 제 딴에는 직원에게 호의를 베풀었다고 생각했고 이로 인해서 직원과 나 사이에 감정적 공감대가 조금 쌓였다고 착각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일방적으로 그를 공감했기 때문에 그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고 그래서 다른 모든 손님과 똑같이 대우하자 서운했던 것이다. 내 감정을 먼저 받아들이지 않고 이성적으로 생각했다고 주장하느라 역으로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진상이 될 뻔했다. 



 

 소심해서 역으로 진상이 되고 마는 사람들이 나 말고도 종종 있는 것 같다. 방금 말한 일에서는 얘기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서 다행이었지만 직접적으로 문제의 원인에게 말하지 않고 문제가 생겼을 때 이게 따질 만한 일인가 스스로에게 계속 질문하다 보면 자꾸 내 입장에서 합리화하느라 문제를 과장해서 생각하게 되고, 그 결과 문제의 당사자에게는 매우 갑작스럽게 쏘아붙이게 되고 만다.


  <상처 줄 생각은 아니었어>(돌리 추그, 2020.)라는 책에서는 스스로 도덕적이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그 믿음으로 인해 오히려 비도덕적 행위를 하게 되는 이유에 대해 "도덕적 정체성""자기 위협"이라는 개념으로 접근한다. 이 책에 따르면,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 도덕적이라고 생각하고 싶어 한다. 심지어 KKK단(백인우월주의 집단)의 일원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이를 "도덕적 정체성"이라고 한다. 


 "도덕적 정체성"을 가진 인물은 실제로 선한 행동을 할 수도 있지만 스스로 선하다고 믿는 것으로도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다. 그러나 정체성은 스스로 믿는 것 외에도 외부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 내가 부자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남들이 부자라고 봐주지 않으면 그 정체성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인정이 필요하다. "도덕적 정체성"에 대한 인정을 책은 "쿠키"라고 비유한다.


 도덕적 정체성의 인정이란 "쿠키"를 얻기 위해 나는 카페 직원에게 상냥히 대했다. 여기까지는 크게 나쁠 것이 없다. 그렇지만 나는 그것을 공공연히 인정받기를 무의식적으로 원했고 직원도 그에 감사해야 한다고 친절을 강요했다. 배려의 대상에 대한 고려 없는 "쿠키"를 위한 행동은 오히려 정말 좋은 행동을 하는지에 대한 고려를 막아버리고, 도덕적으로 보이는 일을 하게 한 것이다. 


 그 결과, 나는 내 선의는 확대해석하고 의례적인 직원의 행동을 불쾌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을 한 자신의 "도덕적 정체성"에 스스로 의문을 갖게 되었다. 책에서는 자신이 선한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이 "악인"처럼 묘사될 때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이를 "자기 위협"이라고 했지만 수치심을 잘 느끼고 자신감이 부족한 나 같은 사람은 외부의 비난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비난을 주로 위협이라고 받아들이는 듯하다. 


 이때, 나 자신과의 정체성 인정 싸움에서 나는 필사적으로 외면하거나 도덕적 정체성을 포기하는 양자택일 상태에 놓이게 된다. 책에서는 타인의 인정에 대한 욕구를 스스로 자신에게 "쿠키"를 주는 것으로 대체하고, 완벽한 선함이란 개념을 버리고 지속적으로 선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으로 자신을 정의하도록 권유한다. 그렇지만 스스로 지극히 낮게 평가하는 사람이 스스로에 대해 어떻게 인정할 수 있을까? 


 우선 내 감정부터 챙기는 것이다. 일단 섭섭하고 서운해하라. 자기 회의와 자괴감이 큰 나에게 내 감정에 대한 인정이 내게는 가장 필요한 "쿠키"였던 것이다. 내 감정이 사회적인 인식과 일치하는지 중요하게 생각하던 사고에서 벗어나 일단 감정부터 챙기는 것이다. 혼자 느끼는 감정 자체에는 잘잘못이 없다. 스스로 정체성에 대한 위협이라고 느끼기 전에 산출물인 감정을 먼저 받아들이자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자연스럽게 인식할 수 있었고 나아가 "잘못했다"는 인식도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앞으로도 내 도덕적 정체성이 위협을 마주할 일이 계속 일어날 것이다. 작게는 소소한 진상짓부터 크게는 사회 전반적 차별을 옹호할지도 모른다. 나는 생각보다 편견이 많은 사람이고 어떤 부분에서는 사회적 약자이지만 동시에 기득권자이기도 하기 때문에 안 좋은 행동을 죄책 감 없이 해버릴지도 모른다. 그리고 스스로 깨달은 뒤에도 이를 무시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합리화하다가 죄 없는 타인의 탓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때를 대비해 연습해 본다. 속상하니? 많이 속상해한 다음에 천천히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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