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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말 좀 해봐요

<Say anything>- X-japan

by 히피 지망생

고등학교 시절, 나에게 야자(야간 자율학습)는 음악 감상 시간이었다. 밤 11시까지 이어지는 야자 시간을 음악의 도움 없이 버티는 건 불가능했다. 자 시간을 음악 감상 시간으로 활용한 게 나뿐만은 아니었다. 주위를 둘러보면 둘 중 하나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있었다.


집이 좀 사는 친구들은 CD플레이어를 들었고, 대부분은 워크맨을 들었다. 얼리어답터들은 MD 플레이어라는 이름의 신문물을 굳이 학교로 들고 와 자랑하기도 했다. MD 플레이어는 몇십만 원이나 하는 고가품이었는데, 곧이어 mp3 플레이어가 등장하는 바람에 반짝하고 사라졌다.


이게 바로 MD 플레이어


친구들의 음악 취향은 제각각이었다. 대부분이 HOT, 젝스키스, 핑클, SES 등 당시 유행하던 아이돌 댄스 음악을 들었고, 유행을 타지 않는 발라드를 듣는 친구도 꽤 있었다. 남고에서는 특히 락 발라드가 유행했다. 당시 남고에서 가창력은 김경호의 <금지된 사랑>을 삑사리 나지 않고 올릴 수 있느냐로 결정되었다. 김경호를 통과하면 스틸 하트의 <She's gone>이라는 관문이 나왔는데, 이 노래를 끝까지 올릴 수 있다면 아묻따(아무것도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가창왕에 등극할 수 있었다. <She's gone>은 워낙 난이도가 헬이라서 삑사리 한두 번 정도는 인정해 주는 게 국룰이었다.)


아직 유행이 시작되지도 않은 힙합을 듣는 친구들이 한 반에 한 두 명 정도 있었고, 헤비메탈을 듣는 친구들 반에 한 명씩은 있었다. (내가 여기에 속했다.) 내 짝꿍이었던 M은 하루에 몇 마디 안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내성적인 친구였는데, 마이클 잭슨 빠돌이였다. 그렇게 조용하던 친구가 마이클 잭슨 얘기만 하면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하루는 M이 쉬는 시간에 마이클 잭슨의 시그니처 동작 중 하나인 'Lean' 몸소 따라 하며 시범을 보여줬다.

"봐봐. 몸을 나처럼 앞으로 기울여봐. 보통 사람은 몸이 15도 이상 기울면 앞으로 고꾸라져. 그치?그런데 마이클 잭슨은 45도 각도가 넘어가도 을 일으킬 수 있어. 진짜 대단하지 않냐?"



그 각도에서 다시 처음 자세로 돌아간다고?예수님이야, 뭐야? 물리법칙상 그 동작은 천하의 마이클 잭슨이라도 불가능해 보였는데, M은 마이클 잭슨이 진짜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었다. 땐 거짓말할 리 없는 착한 M이 그렇다고 하니 나 또한 그런가 보다 했다. 그래, 마이클 잭슨이 보통 사람은 아니니까. 'Lean'이 마술 트릭을 이용한 동작임을 알게 된 건, 그로부터 몇 년 후였다. (이 사실을 알면 M은 실망할 것이다. 부디 M이 지금도 이 사실을 모르고 있기를.)


야자 시간은 새로운 음악을 접할 수 있는 엑스포(세계 박람회)기도 했다. 어떤 친구가 음악을 좋아하는지는 이어폰을 얼마나 오래 꽂고 있나를 관찰하면 알 수 있었다. 나는 틈만 나면 이어폰을 낀 친구에게 다가가 물었다.

"지금 무슨 음악 들어?"

어쩌다 나와 취향이 비슷한 친구가 나오면 반을 바꿔 듣자고 제안했다. 카세트테이프 하나에 5천 원씩 하던 시절이었으니, 머니 사정이 넉넉치 않았던 나로서는 궁여지책 끝에 나온 생존 전략이었다.


하루는 레이더망에 은색 CD를 돌려 듣는 친구들이 포착되었다. 나와 취향이 안 맞았던 친구들이라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점점 그 은색 CD를 돌려 듣는 친구들이 늘어났다. 은색 CD를 듣고 있는 친구에게 다가가 물어봤다.

"그 CD 누구 거야?"

"아, 이거. X-japan이라고, 요즘 알게 모르게 유행하는 일본 락 밴드야. 게 불법 해적판 CD이긴 한데, 웬만한 히트곡은 다 들어있어."


X-japan? 설마 그 X-japan? X-japan이라면, TV 탐사보도 프로그램(아마도 피디수첩)에서 뉴스로 먼저 접한 적이 있었다. 일본 음악, 영화 등을 불법으로 유통하는 사람들 때문에 무분별하게 일본 문화를 접하는 청소년들이 우려된다는 것이 뉴스의 골자였다. (호랑이 백덤블링하던 시절 얘기 같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일본 문화는 입이 법적으로 금지되었다.) 그때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된 게 X-japan이었다.


나는 영상을 PD의 의도 그대로 흡수했다. 당시 내 나이 열여덟. 문화에 있어서만큼은 흥선대원군 같은 쇄국정책으로 일관하던 나로서는 그들의 머리 이부터 감당이 안 됐다. 아니, 남자 머리가 왜 저렇게 길어? 미역이야, 뭐야?그 와중에 그게 긴 머리를 하늘로 솟구치게 만들다니. 김무스야, 뭐야?심지어 남자가 짙은 화장까지? 반일 감정으로 똘똘 뭉쳐있던 나는 그들을 흠모하는 내 또래 청소년들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에구야, 세상이 말세다, 말세야' 하면서 탑골 공원에서 바둑 두시는 할아버지 마냥 훈수를 내뱉을 기세였는데, 하필 그 밴드가 우리 반에 무장공비처럼 침투한 걸 목격하고 만 것이었다.

전설의 김무스 아저씨

솔직히 궁금하긴 했다. 이렇게 많은 친구들이 그들의 음악을 돌려 듣는 데엔 이유가 있지 않을까? 친구에게 나도 문제의 해적판 CD를 빌렸다. 별 기대 없이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Endless rain>, <Tears>, <Forever love>, <Unfinished>, <Crucify my love>...


잠깐! 아군이다! 사격 중지! 나의 반일 감정은 그들의 음악 앞에 바로 무장해제 되었다. 하루만 듣고 돌려주기로 한 그 CD는 대여 기간이 일주일로 연장되었다. 그즈음부터 노래방에서 <Endless rain>과 <Tears>를 일본어 가사로 부르는 친구들이 늘어났다. 나는 마이너 취향의 소유자답게 <Unfinished>를 가장 좋아했다.


그렇게 나도 X-japan의 팬이 되었다. 팬이 되면 그들의 라이브 실력 궁금해지기 마련이다. 라이브 하기 쉽지 않은 노래들인데, 라이브는 어떨까?전성기 시절 토시의 보컬은 어느 해외 유명 밴드의 보컬과 비교해 봐도 손색이 없었다. 허스키하면서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쭉 뻗어 나가는 보컬은 허스키한 목소리는 고음에 불리하다는 편견을 산산조각 냈다. 그런 애절한 멜로디를 부른 건 토시였지만, 만든 건 요시키였다. 둘은 환상의 짝꿍이었다. 대중음악사를 돌아보면 비틀스의 존 레넌과 폴 매카트니(리버풀 동네 친구 사이), 오아시스의 갤러거 형제(아버지에게 맞고 자란 형제 사이)처럼 이건 운명이다 싶은 조합들이 있는데, X-japan도 그랬다. 토시와 요시키가 4살부터 같은 유치원을 다닌 유치원 동기라니, 그들이 다른 유치원을 다녔다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그들의 라이브 영상은 볼 때마다 감탄을 자아낸다. 그들의 전공인 스피드 메탈과 전공은 아니나 전공처럼 되어버린 락 발라드, 어느 것 하나 모자람이 없다. 대부분의 락 밴드는 포커스가 보컬에 쏠릴 수밖에 없는데 X-japan은 요시키와 히데(기타) 및 타이지(베이스), 파타(세컨드 기타) 다른 멤버의 지분도 무시할 수 없다.

몇몇 곡에서는 보컬이나 기타보다 뒤에서 피아노와 드럼을 연주하는 요시키가 더 돋보이기도 했다. 요시키의 격정적인 피아노 연주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은 노래에 더 몰입하게 만들었던. 특히 <Say anything>을 연주할 땐 요시키의 격정이 더 두드러졌는데, 실연의 아픔이라기엔 아픔이 너무 커 보였다. 저렇게 어깨가 들썩거릴 정도로 슬픔이라면 내가 모르는 사연이 있는 건 아닐까? 의문은 몇 년 전 발표된 다큐멘터리 <We are X>에서 풀렸다.



요시키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누워있는 모습을 두 눈으로 목격했다. 아버지의 죽음을 마주한 순간이었다. <Say anything>은 어린 요시키를 남기고 스스로 세상을 등진 아버지께 바치는 노래였다. 이젠 가사가 다르게 들린다. 이 노래의 'Say anything'은 '연인이여, 우리 얘기 좀 해요. 다시 내게 돌아와 줄 수는 없나요'가 아니라, '아빠, 뭐라고 말 좀 해봐요. 왜 이렇게 누워만 있어요?' 였던 것이다. 이제야 의문이 풀렸다.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그의 어깨를 들썩이는 이유가.



무슨 말이라도 해줘요. 상처받을 말이라도.

무슨 말이라도 해줘요. 그대를 잊지 못한 내 마음에...

무슨 말이라도 해줘요. 달콤한 거짓말이라도 좋으니...

무슨 말이라도 해줘요.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내 가슴에...


그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꿈속에서라도 그럴 수만 있다면.

하지만 현실에서는 끝없는 비를 맞고 있죠.

멈추지 않는 눈물을 백일몽에 물들이면서...


무슨 말이라도 해줘요. 어떤 말이라도 좋아요.

무슨 말이라도 해줘요. 나를 떠난다 할지라도.

무슨 말이라도 해줘요. 나는 꿈속의 말만 들을 수 있기에

무슨 말이라도 해줘요.

당신만이 내 눈물을 닦아줄 수 있어요.

(중략)


시간은 내 삶을 바꾸겠죠. 허나 그댈 향한 제 마음은 그대로일 거예요.

시간이 당신의 마음을 변하게 한다 해도 그댈 위한 내 사랑은 변하지 않을 거예요.

무슨 말이라도 해줘요.

당신이 이렇게 가버리면 난 어디로 가야 하나요?

무슨 말이라도, 무슨 말이라도...


- X-japan의 <Say anything> 중



노래 후반부에 요시키의 내레이션이 나온다. 이젠 이 부분이 아버지께 바치는 편지라는 걸 알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들이 아름답게 기억되겠죠. 비가 그치면, 눈물은 기억의 상처를 씻어줘요. 모든 것이 새로운 색을 입고, 모든 음이 마음의 멜로디를 연주해요. 질투는 서사시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욕망은 꿈에 안겨요. 하지만 내 마음은 아직 혼돈 속에 있어요.

AND(그리고)..."


AND 다음에 요시키는 결국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걸까? 너무 어린 나이에 스스로 그를 떠나버린 아버지께 요시키는 무슨 말이 하고 싶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까?그랬다면 왜 굳이 그 말을 뱉지 못하고 침묵으로 남겨뒀을까? 아니면 왜 날 그렇게 빨리 떠났나요, 라는 원망? 이렇게 또 하나의 의문을 안게 됐다. 답은 요시키만 알 지만, 끝내 삼켜버린 말 중에 사랑한다는 말은 꼭 들어갈 것 같아서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나는 요시키 같은 표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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