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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회 줄다리기 입장하다 울컥한 사연

<독립군가> - 크라잉넛

by 히피 지망생

딸아이의 카카오톡 프로필을 보고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단비의 카카오톡 상태메시지엔 이렇게 쓰여있었다.

"세상 모든 게 궁금한 나는 ooo"


피는 속일 수 없나 보다. 어쩜 이렇게 호기심 많은 것까지 날 빼다 박았을까. 나 역시 어린 시절, 세상 모든 게 궁금한 아이였다. 지금이야 웬만한 궁금증은 스마트폰이 해결해 주는 시대지만, 내가 어렸을 땐 인터넷이 없었다. 궁금증을 해결하려면 주위 어른께 여쭤보거나 백과사전을 찾아보는 게 다였다.


그땐 나처럼 궁금을 해결 못한 사람들이 많았는지 금한 걸 물어보면 전문가가 나와 대신 답해주는 맷의 TV 프로그램도 있었다. 제목은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시청률도 꽤 높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혹시나 해서 찾아봤더니 아직도 방송 중이다. 와우. 1983년부터 방송했으니 잘하면 대한민국 최장수 프로그램 기록도 깨겠는걸? 하고 찾아봤더니, 동물의 왕국은 1970년부터 지금까지 방송 중이시다. 와우.


<무엇이든 물어보세요>는 별의별 궁금증을 해소해 줌으로써 궁금한 게 생기면 잠 못 자는 나 같은 궁금러들의 불면증 해소에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 그렇다고 모든 궁금증을 해소해 준 것은 아니었다. 를 들어, 노래의 멜로디는 기억나는데 제목이 기억 안 나는 경우, 그런데 노래에 대한 정보는 지극히 제한적인 경우엔 <무엇이든 물어보세요>는 <그것만큼은 저희도>...가 되었다. 바로 다음과 같은 경우였다


며칠 전, 친구로부터 이런 카톡을 받았다.



"빛아, 잘도 오랜만이지? 팝송인데 2-3년 전쯤 됐을 건데... 남자 가수가 부른 거고 되게 감미로워. 그 노래가 갑자기 궁금해서..."

"겅 말하믄 어떵 아나?(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아냐? 감미로운 남자 가수가 한둘이냐? 그래도 찾아보려고 노력은 해볼게.) 나랑 같이 들은 거라? (나랑 같이 있을 때 들은 거? 내가 그 노래를 틀었다는 거지? 그게 언제였지?)"


친구가 얼마나 답답했으면 카톡까지 보냈을까 싶어 답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나, 실패했다. 목소리가 감미로운 남자가수는 너무 많기 때문이다. 목소리가 감미롭지 않은 가수를 찾는 게 더 빠를 만큼. 여기에 함정이 있다. 목소리가 감미롭지 않으면 가수가 되기 힘들다. 다시 말해, 목소리가 감미로운 남자 가수를 찾아달라는 친구의 부탁은, 내가 열한 살 때 서귀포약국 앞 버스정류장에서 이상형의 여자를 발견했는데 그 여자를 찾아달라는 부탁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나는야 의지의 한국인. 아직 포기하지 않았으니, 친구야, 멜로디라도 기억나면 다시 연락 주라. 내 찾아내고 말리라. 너의 목소리가 감미로운 남자 가수를.

나에게도 이 친구처럼 오랫동안 미스터리에 쌓여있 노래가 있었다. 다만 경우는 조금 달랐는데, 나는 노래의 원곡 또는 작곡자가 궁금한 경우였다. 사건의 발단은 2001년 백호기 축구대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백호기 축구대회는 도내 남자 고등학교 축구부와 각 고교 동문의 자존심이 걸려있는 대회로, 축구만큼이나 뜨거운 응원 열기로 유명하다. 제주도는 사회에 나가면 "고등학교는 어디 나완?"이라는 질문을 "대학교는 어디 나완?"보다 더 자주 들을 정도로 고등학교 동문의 끈끈함이 유별난데, 백호기는 축구라는 만국 공통의 관심사까지 걸려있으니 응원 열기가 과열될 수밖에 없었다. 오죽하면 백호기는 응원 보러 간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백호기 응원의 백미는 단연 카드 섹션, 아니 바디 섹션이었다. 멀리서 보면 카드 섹션처럼 보이는 이 응원은 교복 재킷을 펼치거나 뒤로 도는 등의 동작을 활용해 카드 섹션과 같은 효과를 낸다. 이젠 백호기의 상징이 되어버린 바디섹션 응원은 늘 감탄을 자아냈다.


학교 이름이나 메시지를 글자로 만드는 건 기본이었다. 호랑이가 달리는 장면을 표현하기도 하고, VICTORY라는 글자가 한 글자씩 점멸하며 새겨지기도 했다. 내가 봤던 장면 중 가장 쇼킹했던 장면은 탱크가 와서 미사일을 쏘면 '패'라는 글자가 산산조각 나는 장면이었다. 지금도 유튜브에서 '백호기 응원'이라고 치면 레전드 영상이 많이 나오는데, 예전에 <일요일 일요일 밤에>였던가, MBC 예능 프로그램에서 시청자 제보영상이라며 백호기 응원 영상을 틀어줬던 기억도 있다.



사람마다 어느 학교 응원이 더 뛰어난가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다. 나와 같이 갔던 친구들은 대기고 응원을 가장 높게 쳐줬다. 솔직히 응원만 보면 나도 대기고의 응원이 가장 화려하고 멋있었다. 다만 심장을 가장 뜨겁게 달군 건 제주일고의 응원이었다. 콕 집어 말하자면, 일고의 응원가인 <차돌가>. 이상하게 이 노래만 들으면 나도 당장 저기로 뛰어들어 저들과 함께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난 일고 출신이 아닌데도.


궁금증이 생긴 건 바로 그때였다. 이 노래, 분명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단 말이지. 어디서 들었더라? 작곡은 누가 했지? 대학 동기 중 일고 출신 동기들을 수소문해서 물어봤다. 그때마다 대답은 같았다. 작사는 누가 했는지 알겠는데 작곡은 누가 했는지 모르겠다고. 와, 이거 일고 총동창회에 전화해서 물어볼 수도 없고, 누가 제 궁금증 해결해 줄 분 안 계신가요? 분명 어디선가 들어본 멜로디인데... 아무튼, 나는 이 노래를 참 좋아했다. 이 노래에는 다른 학교의 화려한 바디 섹션을 무력화시키는, 나도 저들과 뒤섞여 응원가를 따라 부르고 싶게 만드는, 뜨거운 뭔가가 있었다.


내가 이 노래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 수 있는 사례가 있다. 몇 년 후, 나는 길을 걷다가 제주 국제관악제 퍼레이드를 마주쳤다. 일도 없겠다 길거리에 앉아 구경이나 하다 가자 하고 있는데 저 멀리 귀에 익은 멜로디가 들려왔다. <차돌가>였다! 일고 관악대가 <차돌가>를 연주하며 시가행진을 하고 있었다. 나는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마치 <피리 부는 사나이>를 쫓아가는 아이들처럼, 일고 관악대의 꽁무니를 따라가며 노래를 불렀다. 가사도 모르면서.



빠바빠빠 빠바빠빠 빠빠빠바-

빠빠바 빠바바빠 빠빠빠빠-


그렇게 몇 분을 쫓아가다가 일고 출신도 아닌데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나 현타가 와서 돌아오긴 했지만, 그만큼 이 노래는 중독성이 강했다. 이야기가 잠시 샛길로 샜는데 다시 본론으로 돌아서, 결국 <차돌가>의 원곡이나 작곡자를 찾진 못했다. 언젠가는 답을 알아내리라 다짐하며 이 미스터리를 마음속 <그것이 알고 싶다> 폴더에 넣어둔 지 언 4년, 우연히 그 노래의 원곡을 알게 건 뜬금 없게도 국가보훈처 덕분이었다. 국가보훈처의 지원 아래 <광복 60년, 독립군가 다시 부르기 '다시 부르는 노래'>라는 제목의 앨범이 발매되었는데, 이 앨범에 차돌가의 원곡이 실려있었던 것이다.


아, 이렇게 오랜 궁금증을 풀게 된 것도 감개무량한데, 그 노래를 부른 밴드가 당시 격하게 애정했던 밴드였음은 물론, 또 노래 제목이 <독립군가>인 데다가, 노래를 들을 때마다 뜨거웠던 이유가 노래에 얽힌 사연(일제강점기 시절 독립군을 응원하는 노래) 때문이었던가 하는 생각에 닿으니, 아, 하늘도 울고, 나도 울고, 크라잉넛도 울고.

작곡자 이름이 Henry Work(작곡자 성이 Work? 일만 하는 가문임?ㄷㄷ)

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용사야

조국의 부르심을 네가 아느냐

삼천리 삼천만의 우리 동포들, 건질 이

너와 나로다


[후렴]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독립문의 자유종이 울릴 때까지

싸우러 나가세


원수들이 강하다고 겁을 낼 건가

우리들이 약하다고 낙심할 건가

정의의 날쌘 칼이 비키는 곳에

이 길이 너와 나로다

(후렴)


너 살거든 독립군의 용사가 되고

나 죽으면 독립군의 혼령이 되니

동지야 너와 나의 소원 아니냐

빛낼 이 너와 나로다

(후렴)


압록강과 두만강을 뛰어 건너라

악 독한 원수무리 쓸어 몰아라

잃었던 조국 강산 회복하는 날

만세를 불러 보세

(후렴) x2

- 크라잉넛의 <독립군가> 중



십 년 후, 나는 제주의 어느 초등학교에서 말을 겁나 안 듣는 6학년의 담임을 맡게 되었고, 남자 선생님이라는 이유로 운동회 줄다리기 연습을 총괄하게 되었다. 운동회의 각 종목마다 입장곡을 어떤 노래로 하느냐에 따라 경기에 임하는 선수들의 결의가 달라지기 때문에 6학년 줄다리기 선수들의 입장곡을 뭐로 할지는 매우 중요하다. 마디로 입장곡으로 <뽀로로>를 틀면 노는 게 제일 좋은 줄다리기가 되고, <캐리비안의 해적>을 틀면 필사즉생의 줄다리기가 된다. 나는 동학년 선생님들께 입장곡만큼은 나에게 맡겨달라고 부탁했고, 렇게 입장곡은 <독립군가>로 결정되었다.


운동회 당일, 나를 선두로 6학년 청군, 백군 선수들이 줄지어 입장하는 가운데 대형 스피커로 <독립군가>가 연주되었다. 이제 나는 다른 학교의 응원가를 가사도 모르면서 "빠바빠빠 빠바빠빠 빠빠빠바-" 하며 따라 부를 필요가 없었다.


"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용사야

조국의 부르심을 네가 아느냐

삼천리 삼천만의 우리 동포들, 건질 이

너와 나로다"

(이하 생략)


이토록 신나는 펑크 연주에 이토록 슬픈 가사라니. 그런데 운동회 분위기에 또 이렇게 어울리다니. <독립군가> 가사를 목청껏 따라 부르며, 도 모르게 결연해졌고, 아마 나는 조금 울컥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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