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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n잡러 생활 : 4월 결산

뜬구름 Rising

by 히피 지망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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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중순, 대학 동기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선생님 그만둔 거 맞냐고. 우리 학교 와서 진로 프로그램 진행해달라고. 리랜서가 된 지 2주가 지났는 데도 일 관련 연락이 한 통도 없자 슬슬 불안감이 엄습해 오던 그때, 이 전화 한 통은 나에게 구원이었다. 신기하게도 몇 시간 후 다른 섭외 전화를 받았다. 2주간 전화 한 통 없다가 이 날만 2건의 계약이 성사된 것이다. 포기하지 말고 가던 길 계속 가라는 하늘의 계시 받아들였다.


바깥에 나가면 고졸과 다를 바 없는 '초등교사 출신' 타이틀이 이렇게 도움될 때도 있다니, 든 배워두면 나중에 써먹을 데가 생기니 술이라도 배워두라는 할머니 말은 틀리지 않았다.

학교에서 외부 강사를 부를 땐 학교가 교육 현장인만큼 강사 검증이 필수적이다. 현실적으로 학교에서 할 수 있는 검증이라고 해봐야 범죄 조회 정도가 전부다 보니 강사의 자질 검증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여담이지만, 아내는 학교에서 부른 외부강사가 수업 도중에 문제를 일으키고 사건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현타를 느껴 교육을 떠났다) 그 와중에 '초등교사 20년 경력'만큼 검증 필요 없는 타이틀이 또 어딨겠나. 초등교사로 근무한 이력이 움 될 때가 오다니. 20년을 잘 텨준 나, 새삼 칭찬해.(사실 버티는 거 외엔 답이 없긴 했다^^;;)


수업 전날, 무대 검차 학교를 방문했다. 6학급 규모의 아담한 학교였고, 시골 학교답게 아이들도 순수해 보였다.

날 섭외해 준 대학 동기는 교무부장을 맡고 있었다. 학교에 도착하고서야 이 학교의 연구부장이 꽤 오래 알고 지낸 2년 후배라는 걸 알게 되었다. 후배는 바쁜 시간을 쪼개 나를 위한 현수막을 만들어줬다. 이 글을 볼 지는 모르겠으나 후배에게 다시 한번 감사인사를 전한다.


무대를 보니 관객과의 거리가 생각보다 너무 가까웠다. 객과의 거리가 가깝다는 건 그만큼 트릭을 노출하기가 쉽다는 뜻이다. 대안은 오직 연습뿐. 집에 돌아오자마자 로 연습을 시작했다. 무대 위에서 마술쇼를 할 게 아니라 '진로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할 거기 때문에 '꿈'을 주제로 한 스토리텔링을 구성하고 이를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데 주안점을 두 리허설을 진행했다.


그리고... 아이들과 선생님께 나눠줄 요술풍선을 만들었다. 처음인 만큼 잘하고 싶었고, 내일 만나게 될 아이들이 나의 첫 관객 큼 잘해주고 싶었다. 욕심에 푸들, 꽃, 총, 칼 등 이것저것 만들다 보니 정작 마술 연습시간은 줄어들어 선물 준비와 연습을 모두 마쳤을 땐 새벽 2시. 개 수업도 이렇게 준비해 본 적 없는데, 진심은 진심인가 보다. 열심히 준비한 만큼 잘 되어야 할 텐데.

결과적으로, 는 이래저래 아쉬웠지만, 아이들은 수업을 할 수 있었다(고 믿는다) 이건 어디까지나 마술의 힘이다. 마술사가 실수를 하더라도 나만 뻔뻔하면 관객들은 마술사가 실수를 했는지 알 수 없는... ^^ 내가 이래서 마술을 못 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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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강연 이후로 4월에 두 번의 강연이 더 잡혔다. 그중 한 곳은 내가 신규로 발령받았던 학교였다. 2010년, 이 학교에서 6학년 2반 담임으로 근무했는데, 오늘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학급에 6학년 2반이 있어서 기분이 묘했다. 그땐 이 작은 교실에서 39명의 6학년을 데리고 수업했었지ㄷㄷ 지금은 아내가 된 당니 여자친구와 매일밤 장거리 연애를 하느라 평균 수면 시간이 4시간도 안 됐 그때 그시절, 내가 맡았던 업무는 6학년에 방송반...ㄷㄷ 이켜보면 피로와 현타로 점철된 그 1년을 어떻게 버텼는지 모르겠다. (정신없이 사니 시간은 잘- 갔던 것 같다)


2년 전에 6학년 수학여행 찬조 공연에 갔다가 나의 커리어 역사상 가장 폭망한 공연을 한 적 있어서, 그 공연 때문에 마술 공연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긴 적 있어서, 30대 후반 이후로 6학년은 가르쳐본 적 없어서 걱정을 많이 했는데, 다행히 아이들이 착했다. (선생님들도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이렇게 착한 6학년은 간만이라고.)



다만, 그중 한 교실은 들어가기가 주저는데, 불과 한 달 전, 그 반의 담임 선생님이 스스로 세상을 등졌고 나 또한 그의 장례식에 다녀온 바 있었기 때문이었다. 는 내가 강사로 오는 걸 몰랐겠지만, 그가 스스로 세상을 등지지만 않았다면 오늘 우리는... 이 학교에 근무했냐며, 형은 왜 학교 그만뒀냐며 인사를 나누고 반갑게 인사했을 텐데... (이 이야기는 하고픈 얘기가 많이 남아서 추후에 글로 풀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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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강사도 시작했다. 주도는 참 좁다. 내가 들어간 학급의 담임 선생님은 2009년에 동학년으로 근무했던 선생님이었고, 그때의 학년부장은 이 학교의 교장이 되어있었다. 나를 시간강사로 불러준 교감 선생님은 대학 시절 같은 과 3년 선배였다.

수업 중 한 시간은 음악 줄넘기 시간이었는데, 강사가 나와 같은 동호회에 다니는 분이어서 놀라기도 했다. 점심시간엔 몇 년 전 같은 학교에서 근무했던 후배 한 명이 아이스커피를 들고 찾아오기도 했다. 모든 게 시간강사 첫날 일어난 일이었다.


하루만 땜빵하기로 했는데 다음날도 선생님 한 분이 급하게 자리를 비우게 되어 총 4일을 근무하게 됐다.


찰리채플린은 말했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교실도 이와 같아서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인 경우가 많은데, 다행히 나는 몇 시간만 있다가 그것도 수업만 하고 돌아왔기 때문에 대부분의 희극과 약간의 비극만 보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업무도, 회의도, 메신저도, 상담도 그 어떤 것도 없었고, 단지 수업만 하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시 반에 퇴근하며 맞이한 햇살은 유난히 따스했고, 학교 저 멀리 보이는 범섬 뷰에 낭만은 이미 한도 초과였다.

서귀포 학교의 흔한 뷰

낭만이 몸 안에서 빠져나가는 걸 막으려 퇴근길에 화순 곶자왈에 들렸다.



선생님을 하더라도 이렇게만 살 수 있다면 참 행복하겠다, 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시간강사를 얼마나 더할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어딜 가나 환영받는 기분우 참 좋았다. 어딜 가나 와줘서 고맙다, 다음에 또 와달라는 얘기를 들었다. 학교에 근무할 땐 교육부, 교육청의 소모품으로 전락한 듯한 느낌을 많이 받았었는데... 시간강사라는 지위가 나를 어딜 가나 환영받는 존재로 만들어줬다.


내 첫째 딸의 이름은 단비다.'가뭄에 단비'처럼 모두에게 환영받는 사람이 되라는 뜻다. 학교에 시간강사로 갔던 나흘간 나는 학교의 단비 같은 존재였다. (학교에서 시간강사를 못 구하면 다른 선생님들이 돌아가며 그 학급에 보결 수업을 들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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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열린 건즈 앤 로지즈 공연 영상을 보고 있는데... 하아...이거... 갈 걸 그랬다ㅠㅠ 고딩 때 가장 좋아했던 그룹인데.. 오죽했으면 여동생도 내가 그 시절 '건즈 앤 로지스' 좋아했던 걸 기억해내고는 건즈 로지스 내한 공연 안 가냐고 연락 왔는데...


재결성 이후의 공연을 보니 액슬의 보컬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실제로 보면 맴찟할까봐 예매하지 않았다.


이랬던 액슬이...
이렇게 됐다ㅠ.ㅠ

그런데 내한 공연 후기를 보니 보컬 상태가 걱정한 만큼은 아니었다 하고... 첫 곡으로 <Welcome to the jungle>를 불렀는데... 내 기억이 맞는다면, 고등학교 때 PC통신으로 처음 다운 받았던 파일이 이 노래의 뮤직비디오였다. 노래의 전주가 흘러나오자 나는 25년 전, 컴퓨터 앞에 앉아 라면을 먹으며 다운로드 게이지가 차기만을 기다리던 고딩 시절로 돌아가있었다.


액슬의 보컬이 맛이 갔어도... 나는 갔어야 했다ㅠ.ㅠ

슬래시와 더프, 이지 때문에라도 갔어야 했다.

다음에 또 와줘요. 건즈ㅠㅠ

그땐 목 관리 좀 하고ㅠ.ㅠ



# 이달의 노래

:<No matter what>, Boyzone


아내의 부탁으로 서랍장에서 졸업증명서를 찾다가 나의 서른 살 생일에 아내가 선물로 준 책자를 발견했다. 그 책자에는 당시 1년간 우리가 주고받은 문자가 모두 프린트되어 있었는데, 첫 페이지를 여는 순간 타임머신에 강제탑승 당하고 말았다.

이런 식으로 우리가 주고받은 문자가 100페이지에 걸쳐 정리되어 있음


와... 정성 무엇. 지금은 티격태격 틈만 다면 다투지만 그땐 우리 둘 다 제정신이 아니었지. 어쩌면 그때 뜨겁게 달궈진 사랑의 열기로 지금 함께하는 건지도. 뭐든 뜨거우면 뜨거울수록 천천히 식으니까.


아무튼, 책자를 펼치자마자 이런저런 추억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는데, BGM으로 자동재생되는 노래가 있었다. 나의 프로포즈 송이었던 보이존의 <No matter what>. 음악은 시공간을 초월해 나를 그때 그곳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신묘한 힘이 있어서 나는 아내에게 프로포즈했던 그때 그곳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는데...


"졸업증명서 안 찾고 뭐해요?"라는 아내의 말에 시간여행 놀이를 멈출 수밖에 없었지만, 그로부터 한 달간 는 보이존 노래만 듣고 있다.


보이존은 '로넌 키팅과 친구들'이라는 비아냥을 들을 만큼 로넌의 비중이 크지만, 유독 노래만큼은 스티븐의 지분이 높다. 스티븐의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천사 같다.

RIP 스티븐 ㅠ.ㅠ



# 이달의 책

: <나는 결코 어머니가 없었다>, 하재영


전작부터 진즉에 알아챘지만, 하재영 작가는 글을 참 잘 쓴다. 그런가? 하다가 그런가 보다... 그렇네... 하게 되는 글을 쓴다.

이 책에서 그녀는 어머니와 자신의 삶에 흑백 필터가 낀 카메라를 과감히 들이대고 각자의 기억 서랍 상자 깊숙이 구겨둔 기억을 꺼내어 그 의미를 반추한다. 읽다 보면 안티 페미니스트도 페미니스트로 만들어버릴 것만 같은 책.



# 이달의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


어떤 영화는 공포 영화가 아닌데도 어떤 공포 영화보다 공포스럽다. 벽 하나를 두고 펼쳐지는 천국과 지옥. 관심 지역(Zone of interest) 바깥의 세계에 나는 얼마나 선한 사람인가. 나 또한 루돌프 회스처럼 벽 바깥의 세계에 무관심한 사람은 아닐까. 그런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질문 앞에 나는 자꾸만 작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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