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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필수품 없이 살아보기' 보고서

캠핑카에서 불편함 없이 사는 게 가능할까?

by 히피 지망생

올해 초, 우연한 기회에 TV, 냉장고, 세탁기 없이 살아볼 기회를 얻었다. ‘극단적(?) 미니멀리스트로서의 삶이 가능한가? 나와 미니멀 라이프는 어울리는 조합인가? 캠핑카에서 불편함 없이 사는 게 가능할까?'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는 실험으로 삼고, 그때그때 느꼈던 것들을 기록하기로 했다.

결과는 실패. 미니멀 라이프에 실패한 게 아니라 느낀 점들을 기록하는 일에 실패했다.

지긋지긋한 ‘선천적 게으름과 후천적 귀찮음의 콜라보’는 오늘도 나를 괴롭힌다ㅠ.ㅠ

늦었지만, 생활필수품 없이 살아보며 느낀 점들을 기록한다.


1. TV


TV를 보는 시간이 결코 나를 행복하게 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30대 초반에 깨달았다. 그 날 부로 TV를 없앴다. TV 없애기는 내 삶에 나비효과를 일으켰다. TV가 없어지자 시간이 많아졌고, 다른 할 일을 찾게 됐다. 그러다 발견한 또 하나의 즐거움이 평생 읽지도 않던 책이라니. 삶은 예측할 수 없기에 불안하지만, 그래서 재미있다.

TV(없애기)는 평생 책을 읽지 않던 나에게 ‘새로운 지식을 알고 느끼고 깨우치는’ 즐거움을 일깨워줬고, 급기야 책과 담을 쌓고 살던 나에게 책을 쓰는 기적을 선물해줬다. (책은 판매는 하지 않고, 주위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나중에 딸이 크면 선물로 줄 계획이다.)


읽고 쓰는 사소한 행위를 통해 나는 그동안 내 마음속 가장자리, 볕 들지 않는 곳에 짱박아놨던(?) 무의식의 서랍을 열었다. 심해 잠수부처럼 마음속 심연 저 밑바닥까지 들어가 휘이 저으면 감정의 찌꺼기들로 마음속이 뿌예졌는데, 신기하게도 그 기억들을 글로 표현하면 부유물이 사라지고 마음속이 투명해졌다. 그때마다 상처가 치유되는 느낌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얻은 소중한 통찰들로 인해 타인의 시선에 휘둘리지 않는 개별적 자아로 우뚝 섰다. 그 속에서 난 자유로워졌다.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영원히 나를 속박할 것만 같았던 고통의 굴레로부터...


* TV가 가져다준 구체적 변화가 궁금하다면 ‘TV를 끄고 삶을 켜자’를 읽어보시길...

https://brunch.co.kr/@hanvit1102/15


2. 냉장고


아마도 우리나라는 단일 식품(김치)을 보관하는 냉장고가 있는 세계 유일의 국가일 것이다. 냉장고가 2대씩 있는 집도 많다. 냉장고가 7대 있는 집도 봤는데, 냉장고가 그렇게 많은 이유를 이해하려고 노력해도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 이해를 포기했던 기억이 있다.


물론, 나도 냉장고가 1대도 없는 삶은 상상하기 힘들다. 냉장고가 없으면 생기는 불안은 ‘당장 눈에 보이는 불편함’인지라 나도 작은 중고 냉장고라도 사야 하나, 하는 고민을 했었다. 그랬다면 냉장고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도 없었겠지. 그리하여 냉장고 없이 살아보기로 결정했다.


[결론]

없으면, 불편하다. 없어도, 살만하다. 그러나 있으면, 좋다^^


냉장고가 없으면 당장 불편해질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내가 냉장고 없이 불편함을 느꼈던 건 딱 2가지 경우다. 하나는 집에서 사람들과 술 마실 일이 있을 때. 시원하지 않은 맥주를 마시는 건 물고문에 가깝다. 때문에 집에서 다른 사람과 술 마시는 날엔 늘 각얼음을 사다 맥주 곁에 두고 맥주 온도를 유지해야 했다. 또 하나는 여름철에 우유를 보관할 때. 물은 시원하지 않아도 상관이 없는데 여름에 우유를 바깥에 두면 상한다. 이 2가지 외에 불편했던 건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대신 좋은 점도 있다. 늘 딱 먹을 만큼만 음식 재료를 사게 된다는 것. 그 날 그 날 뭘 먹을지 생각해보게 된다는 것. 요즘엔 1인 가구가 증가하는 현상을 겨냥하여 다양한 1인분 음식재료들이 나온다. 남는 음식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딱 내가 먹을 만큼만 만들면 되니까. 음식물 쓰레기도 거의 나오지 않는다.


누군가는 냉장고를 두고 미래를 살게 하는 물건이라고 말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냉장고는 미래에 내가 먹을 물건들을 쟁여두는 역할을 한다. 언젠가부터 ‘지금 이 순간을 살자’라는 소중한 명제를 떠올릴 때마다 냉장고가 떠오르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단, 이건 어디까지나 혼자 살 때 얘기다. 여럿이 살 거라면, 냉장고는 있어야 한다. 불편함을 불편함으로 느끼지 않고 살려는 노력은 필요하나, 굳이 ‘불편해지려고 살’ 필요는 없으니까.


3. 세탁기


세탁기 없이 살기는 가장 난이도가 높다. 결과적으로, 나도 편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 집에 일주일에 한 번씩 가서 빨래를 하고 왔다. 부모님 집이 없다면 아마 셀프 빨래방이라도 갔을 거다. 그만큼 세탁기 없이 사는 건 불편하다. 자연 속에서의 간소한 삶을 예찬하며 통나무집을 짓고 살았던 ‘월든’의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도 빨래하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는 비하인드 스토리만 봐도 빨래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다만, 내 신분이 여행자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지금은 직장 생활을 해야 하기 때문에 ‘보이는 나’를 신경 쓸 수밖에 없고 손빨래를 할 시간적 여유도 없어 세탁기를 쓰지만, 여행자에게 손빨래는 불편함이 아닌 '대안 없는 현실'이다. 캠핑카에서 여행자 신분으로 살게 될 날이 온다면 얼마든지 기분 좋게 손빨래를 할 자신이 있다. 이것이 새로 사는 캠핑카에 세탁기가 없어도 전혀 불안하지 않은 이유다.


내년에 살게 될 캠핑카에는, TV, 세탁기가 없고, 냉장고가 있다.

나에게는, 세탁기 없이 사는 불편함이 없고, 캠핑카 안 자그마한 냉장고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다.


세상은 역시 마음먹기에 달려있다.

나는 더 이상 불편함이 불편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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