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길 인생
며칠 전 리본프로젝트(Re Born Project)를 같이 진행하고 있는 3분과 동대문 종합 시장에 일 보러 갔었는데 세연님이 이 일을 어쩌다 하게 되었는지 우리에게 물으셨다. 어디 보자… 내 전공의 역사를 되돌아가 볼까.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동경 줄리엣이라는 만화책을 보며 주인공의 옷을 따라 그리거나 파티라는 월간 만화 잡지에 그림을 그려 응모하기도 했었다. 중학생 때는 만화부, 미술부를 전전하며 그림 외길 인생을 걸었는데 그때는 입시미술이란 게 있는 줄도 몰랐고 난 그저 만화를 좋아하고 끄적이기를 좋아했을 뿐이었다. 그러다 중3 때 도덕 선생님께서 나에게 저쪽에 새로 생기는 고등학교에 네가 좋아할 만한 과가 있으니 지원해 보라고 알려주셨다. 그래서 가게 된 곳이 의상디자인과였다. 신설된 고등학교로 최신식 장비들과 열정을 가진 선생님이 계셨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맘껏 할 수 있는 곳이었다. 나는 날아다녔다. 수업은 즐거웠고 친구, 후배들과 함께하는 방과 후 활동도 즐거웠다. 성적은 당연스레 잘 나왔고 좋은 내신을 가질 수 있었다.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나는 수시로 어렵지 않게 대학교에 입학했다. 역시나 의상디자인과로.
손이 느리지만 꼼꼼했던 나는 의외로 옷감을 만지는 게 적성에 맞았고 손재주가 있어서 결과물들이 나름 그럴듯했다. 이제는 20년 차가 넘어가니 나에겐 전공자가 전공을 이어서 하고 있다는 것이 스스로에게 자신감이 되었다. 그때 도덕 선생님의 제의가 아니었다면 나는 어떤 길을 가고 있을까? 키도 크고 유쾌했던 선생님의 제안에 별다른 의심 없이 발을 들이고 고1 때부터 외길 인생을 살고 있다.
나에게는 오랫동안 함께한 잠자리 표 재단가위가 있다. 대학 때부터 쓰던 가위로 못해도 15년이 넘은 거 같다. 낡았지만 튼튼하다. 날을 다시 갈면 아직 15년은 더 쓸 수 있을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