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한 만큼 나오지 않는 날

누구나 겪는 순간들에 대하여 #14

by 온담

시험지 앞에 앉아본 사람이라면 아마 알 겁니다.

딱 펼치는 순간, 머리가 하얘지는 그 기분.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줄줄 외웠던 건데,

막상 문제를 보니 하나도 생각이 안 납니다.

그럴 땐 참 억울하지요.

밤새워 공부한 시간,

포기하고 버틴 순간들이 다 헛된 것 같아서요.

“왜 하필 지금 기억이 안 나냐” 싶어 속이 터집니다.

생각해 보면, 노력조차 안 했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공부는 안 하고, 시험 시간에 지우개 굴리며 번호 찍던 때.

그땐 결과가 안 나와도 억울하진 않았습니다.

왜냐면 애초에 준비를 안 했으니까요.


근데 지금은 다릅니다.

억울한 건, 내가 분명 애썼다는 증거입니다.

준비했으니 아쉬운 거고,

노력했으니 속상한 겁니다.

그 기분은 노래방에서는 가사 줄줄 나오다가,

무대에 올라가면 한 글자도 생각 안 나는 순간이랑 비슷합니다.

머릿속은 텅 비고, 마음은 조급해지지요.


하지만 준비한 게 헛된 건 아닙니다.

기억이 순간적으로 숨어버렸을 뿐,

내 안에는 이미 다 쌓여 있는 겁니다.


비록 오늘 시험지에서는 나오지 않았더라도,

그 노력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준비한 만큼 나오지 않는 날,

그건 실패가 아니라 훈련의 일부일 뿐입니다.

내가 쌓아둔 시간과 노력은 언젠가 다른 순간에,

더 단단한 힘으로 나를 지켜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