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시간으로 남기는 송년

나의 뿌리를 만들어준 사람들

by Ondo fiftytwo


“Gratitude is the memory of the heart."

(감사는 마음의 기억이다. - 장 바티스트 마시외)


연말이 되면 나는 기꺼이 미련한 선택을 한다.

술을 마셔야 하는 자리,

집에서 먼 거리, 다음 날 밀려올 숙취와

육체적 피로가 뻔히 예상되는 저녁 약속.

효율을 따지는 나의 '이성'은

가지 말아야 할 이유를 열 가지도 넘게 댄다.

"이제 업무로 엮일 일도 없잖아."

"지금 회사 상사도 아닌데 굳이?"

"그냥 안부 문자 하나 보내고 쉬는 게 낫지 않아?"

하지만 나는 기어코 코트를 챙겨 입고

그 먼 길을 나선다.


나의 '사수'였고, '팀장'이었고,

'부사장'이었던 그분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테이블 마주 앉은 분들은

이제 나의 직속 상사가 아니다.

나를 믿고 지금의 회사로 이직을 결정 해주셨던

부사장님은 이제 다른 회사의 부사장님이 되셨고,

5년 전 나를 팀원으로 품어주셨던 팀장님은

또 다른 곳의 이사님이 되셨다.


우리의 명함은 달라졌고,

비즈니스로 주고받을 이익은 사라졌다.

하지만 나는 1년에 한 번,

무리해서라도 이 자리를 지킨다.


내가 생각하는 감사는 '잊지 않는 것'이고,

그 감사를 표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시간'이기 때문이다.


사실 감사한 마음을 전하는 방법은 많다.

비싼 선물을 보낼 수도 있고,

정성스러운 장문의 톡을 보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어쩌면 가장 쉬운 방법일지 모른다.

가장 어려운 것,

그래서 가장 진심에 닿아있는 것은 결국 시간이다.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나의 시간을 뚝 떼어내어,

오직 당신들을 위해 쓰겠다고 결심하는 것.

그것만큼 확실한 존경과 감사의 표현이 또 있을까.


술잔이 오고 가는 사이,

5년 전의 기억이 안주처럼 오른다.

모두가 내 능력을 의심할 때

나를 믿어주었던 부사장님의 결정.

"너는 충분히 할 수 있는 사람이야"라며,

내가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온몸으로 막아주고 만들어주셨던 팀장님의 배려.


돌이켜보면, 회사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보상은

월급이나 승진이 아니었다.

그것은 '일로 성공해 본 경험',

그리고 그 경험을 가능하게 했던 ‘믿음'이었다.

"내가 해냈구나."

"나도 꽤 괜찮은 사람이구나."

그 선명한 성공의 기억은

내 직업 인생의 깊고 단단한 '뿌리'가 되었다.


한 번이라도 제대로 해봤다는 그 감각이

내 안에 확실히 자리 잡고 나니,

이후 어떤 박한 평가가 불어닥쳐도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

지금의 내가 비바람에도 꺾이지 않고

서 있을 수 있는 건,

그때 그분들이 내 뿌리에 물을 주고

볕을 쬐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 믿음에 보답하는 길은,

내가 여전히 당신들을 기억하고 있음을

나의 '시간'으로 증명하는 일뿐이다.


돌아오는 길, 몸은 천근만근이고 술기운이 오르지만

마음만은 꽉 찬 보름달처럼 환하다.

세상은 인맥을 '관리'하라고 하지만,

나는 인맥을 '감사'하고 싶다.


내 시간을 들이고, 내 마음을 써서.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음을 온몸으로 전하는 것.

이것이 내가 배운, 나의 뿌리에 대한 예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