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시간이 정말 해결해 줄까

by 온돌

다들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는데, 정말 해결해 주는 걸까?

오늘 오후 내내 부장님이 주신 일을 처리했다. 내가 가진 윈도우 PC로는 할 수 없는 일이라, 주변 동기에게 사정해 MAC을 빌렸다. 잘 모르는 파이널컷도 깔고, 구글링까지 동원하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막상 결과물은 시원치 않다. 내가 한 일이 제대로 한 일이 아닌 것 같은 찜찜함만 가득했다. 잘 모르는 나도 일이 무언가 이상하게 됐다는 걸 느꼈는데, 부장님도 당연히 느끼셨겠지.


그렇게 많은 시간을 써놓고 결국 시간만 버린 셈이 됐다. 부장님은 내가 얼마나 답답하실까. 손도 느린데 꼼꼼하지도 못하고 뭐 하나 미덥지 않은 사람으로 보일 것 같았다. 결국 내일 똑같은 일을 다시 하게 되시겠지.


불안은 어둠을 먹고 자란다. 금세 바닥까지 생각이 가라앉는다.


나한테 짜증이 나셨을 것 같아.

똑 부러지고 일 잘하는 신입을 기대하셨을 텐데,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그래서 다 나를 싫어하는 것 같아.

내가 팀에 와서 다들 귀찮을 것 같아.


자리에 돌아와 앉는데 가시방석이다. 얼른 퇴근을 하고 싶었다. 그냥 세상에서 잠시 사라지고 싶었다. 어지러운 마음을 붙잡고 쇼핑몰로 향했다. 도저히 집으로 갈 수 없었다. 뭐라도 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바쁘게 돌아다녔다. 억지로 옷을 샀다. 오늘 내가 했던 일에는 아무런 결과가 없어서 돈으로라도 사고 싶었다.


자꾸 먹먹해진다. 일을 못해서 너무 괴롭다. 해야 할 일도 없고,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누군가는 시간이 지날수록 바빠지니까 지금 이 시기를 즐기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냥 일이 없는 것과,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건 좀 다른 얘기다. 오만하게 들릴 수 있겠으나 그동안 마음먹었던 일은 꽤나 잘 해왔었다. 못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대부분 시간을 들여 노력하면 익숙해졌고 어떤 일은 잘하기도 했다.


회사 일은 좀 달랐다. 모든 것이 처음이고, 노력을 들일 시간이 충분치 않고, 노력해도 잘할 수 없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잘 해내고 싶은 마음과 그러기엔 부족한 내 역량의 간극, 그 커다란 빈틈만큼 괴롭다.


나는 언제쯤 이 팀의 일원이 될 수 있을까. 투명인간 같은 존재가 될까 봐 두렵다. 꿈에 그리던 회사, 오래오래 일하고 싶었는데, 신입채용 공고를 살피게 된다. 어쩌면 그냥 이 업과 내가 맞지 않는 걸 수도 있다. 한참 동안 둘러보다가 또 그만 둘 용기는 아직 없어 창을 닫는다.


집까지 걸어가는 길, 오늘 있었던 일을 가만히 복기해 본다. 누구에게 이 마음을 말하면 좀 나아질까 싶어 연락처를 살피다 닫는다. 바닥난 자존감만큼 상처받은 자존심 때문에 이 마음을 누구에게 말하기도 싫다.


연인에겐 감정 쓰레기통처럼 보일까 봐 싫고,

가족에겐 걱정을 끼치기 싫고,

친구에겐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다.


속에만 담아놓기에는 너무 답답해서, 이러다 진짜 다 놓고 싶어질 것 같아 글로라도 갈기갈기 써본다. 뭐라도 쏟아내야지 숨통이 트일 것 같아서 쓴다. 시간이 정말 해결해 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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