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 머신? 매드 사이언티스트?
저는 실험 연구실에서 곧 졸업을 할 예정으로 졸업 논문 심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졸업 기간 압박에 정신이 온전치 못한 관계로...
오늘 글은 '아 이 사람 지금 졸업을 앞두고 아무 말이나 쓰고 있구나' 하시면서 그저 가볍게 재미로 읽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오늘은 예전부터 생각해왔던 질문:
에 대한 제 개인적인 생각을 간략하게 정리해보려 합니다.
실험 연구자는 1인 기업과 비슷합니다.
저의 얕은 관찰에 따르면, 이 '1인 기업'으로서 이 할 수 있어야 하는 것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크게 봤을 때, 1인 기업의 사업가가 '연구'라는 돈이 드는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 해야 하는 것은
이렇게 실적이 쌓이면 다음 연구 계획도 나오고 다시 그랜트 따기 좋은 명성도 생기고 선순환!
참 쉽죠?
- 연구 주제 설정: 중요하면서도 현실성이 떨어지지 않는, 내가 해결할 수 있는(혹은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고 펀딩을 주는 사람들이 믿어주는) 연구 문제 설정
- 연구 운행: 내가 계획서에 작성한 예상 연구 결과가 내가 제시한 시간 내에, 혹은 더 빠르게 나오게 하기
- 그림 그리기: 결과를 예쁜 figure로 만들기(Python, Matlab, Illustrator, Photoshop, ProCreate든 한땀한땀 대학원의 피땀 장인 정신이든 뭐든!)
- 포스터 만들기: 깔끔함, 가독성, 중요한 건 잘 보이게, 강조하고 싶지는 않지만 질문 나올 필수 요소는 존재하게
- 발표 자료 만들기: 전문적이지만 너무 지루하지 않게, 흐름 강조해서
- 발표 잘하기: '아 이 사람은 연구를 제대로 하는구나'라는 인상을 주는 흡입력
- 사회 활동: 학계에서 공동 연구자, 협력 기업 등 collaborator 만들고 유지하기
- 글쓰기 : 논문 잘 읽히는 논리로 쓰기
- 리뷰 대응: 나의 완벽한 논리와 여린 마음을 상하게 할 수도 있는 논문 리뷰에 대해서 적절히 대응하기
쳐낼 것 쳐내고 따를 것 따르고.
등등...
여기에 만약 이 연구자가 '대학 교수'가 된다면 학교의 행정일, 강의 준비, 학생지도(주로 내가 그린 큰 그림이 현실이 되게 학생들의 생산성을 매니징 하는 것) 등의 업무들이 추가되는 것 같습니다. 물론 보직 등의 추가 업무나 방송, 대중서적 집필, 교과서 번역 등은 개개인의 의사에 따라, 혹은 상황에 의한 압박에 의해 얹어질 수 있네요.
가상의 인물이라고 가정하고 모든 이상적인, 최적화된(optimal) 속성을 나열해보면 이렇습니다.
사람이 기본적으로
- 수와 논리에 꼼꼼하고,
- 감정적인 사고 보다도 논리적인 사고를 편안해하고,
- 일을 미리미리 하고,
- 일의 중요도 분배/시간 분배를 잘하고,
- 감정 기복이 적게 멘탈이 단단하며,
- 한번 본 논리는 구체적인 부분(저자, 숫자, main figures)까지 잘 기억하며,
- 발표와 토론을 잘하고,
- 논리적인 글을 잘 쓰고,
- 연구를 접하면 그것의 근본적인 질문과 핵심/한계가 무엇인지 날카롭게 잡아낼 수 있으며,
- 궁금한 기반 지식이 있으면 영어논문이든, 처음보는 수학이론이든, 무슨 타 필드의 전공지식이든 파고들고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있는 능력,
- '잘 아프지 않는' 신체를 가진다면 좋을 것...
즐기는 경지에 이르지 않으면, 지치지 않는 집요함의 원천은 조금 더 빨리 고갈될 위험이 큽니다.
딱히 쇼핑도, 돈도, 큰 명예나 여행, 파티, 워라밸도 관심 없고,
원래 어릴 때부터 혼자 노는 방식이
'자신이 납득할 수 있을 때까지 측정하고, 기록하고, 실험하고 정리하는 것'인 사람들...인데...
사실 '누가 이렇게 살아' 싶기도 합니다. 주변에 그렇게 많이 보이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요.
하지만 '랩 걸'과 파인만의 책들을 읽어보면, 미드 빅뱅이론의 쉘든이 어릴 때 치던 장난들과 그들이 평소에 자연스럽게 일상에서 하는 행동들 같은 게 자연스러운 사람이 꽤나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진짜 실제로 존재하고, 웃음의 공감을 살 만큼 있습니다. 학부 때는 잘 안보일 수도 있지만, 대부분 대학원생 이상만 모아둔 학회라면 몇 개만 가도 많이 보입니다. 사실 이런 천성 연구자인 사람들이 교수라는 소수의 한정된 자리의 숫자보다도 많이 존재하는 것이 이 세상!
그저 제가 생활해보니, 이런 사람들이 '아 내 인생을 학계에 들인 건 아주 아주 잘못된 선택인 것 같아...'라고 후회할 확률이 낮을 것 같다는 느낌인 거죠.
한편으로는 이런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연구실 선택, 교수님과의 케미스트리 오류, 아무리 해도 결과가 안 나오는 실험... 등 충분히 후회할 수도 있는 지뢰가 많은 것이 과학이라는 분야이니... 다시 한번 부탁드리지만, 오늘 글은 '아 이 사람 지금 졸업을 앞두고 아무 말이나 쓰고 있구나' 하시면서 부디 가볍게 재미로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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