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당군신화(당근마켓 마케터의 에세이집)
눈치 보는 일이 생활습관이 되었다.
태생적으로 나는 제법 눈치가 빠른 편이다. 물론 여기서, '눈치를 보다'와 '눈치가 빠르다'의 의미는 상이할 수 있겠지만 어쨌든 눈치가 빠르고 그걸 잘 보는 사람이다.
눈치를 잘 볼 수 있도록 북돋아준 앤 설리번은 다름 아닌 나의 아름다운 20대(지금도 20대다)의 일부를 장식했던 전 직장이다. 고작 1년 조금 넘게 여기서 일을 했다고 이렇게 눈치를 많이 보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을까.
여기서 잠깐. 1년 반이 어떤 직장인에겐 한 없이 적은 수치에 불과할 것이다. 정말 말 그대로 '고작 1년 반인데?'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대행사를 다니지 않는 사람은 모른다. 또는 대행사를 다니면서도 모른다는 것은 진정한 대행사를 다니지 않는 사람이다(여기서는 진정한 대행사라 쓰고 거지 같은 대행사라 읽는다).
대행사에서의 1년은 말야. 대기업에서 3년, 아니.. 5년의 경력과 맞먹어. 이게 나중에 너에게 큰 무기가 될 거야
지난 직장에 친했던 상사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그때 상사의 말에서 나는 '음, 그만큼 여기서 배울 것이 많고 다른 곳보다 조금은 힘들기 때문에 저렇게 말하는 거구나'라 생각했다. 문제는 '배울 것이 많다', '조금은 힘들다' 등의 수치를 정량적으로 평가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추후에 '많다'는 '아주 많다', '힘들다'는 '아주 힘들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고, 대행사에서의 1년이 대기업에서 3년이라는 말은 1년에 3년 치 일할 걸 다 하기 때문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한 가지 더, 1년에 3년 치 일하고 연봉은 1년 치만 올리는 것이기도 했다.
다시 되돌아와서 난 1년 동안 결국 3년 치의 눈치를 본 셈이다. 눈치를 줬던 설리번1, 설리번2 등은 실제 설리번과는 다르게 차가웠고, 거칠었으며 첫 직장에 갈피를 잡지 못하며 잘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나를 눈치밭 한가운데에 떨어뜨려 놓고 방치했다. 몇몇의 고마웠던 분(진짜 설리번 같은 분)들을 제외하고는, 설리번의 탈을 쓴 그들은 내가 눈치를 못 챌 때면 손바닥에 '눈치'라는 글씨를 정성스럽게 써주었다.
제프(회사에서 내 영어 이름). 그런 거에 눈치 안 봐도 돼요
당근마켓 입사 초기에 왕왕 듣던 말이다.
입사 전부터 시작된 나의 눈치를 살펴보면 이렇다. 당근마켓 최종 합격 전화를 받고, 추가로 합격 메일 한 통을 받았다. 합격 메일에는 필요한 장비(데스크탑, 노트북, 의자 등)를 말해달라고 했으며 당근마켓팀이 사용하는 컴퓨터는 기본으로 맥북, 아이맥을 사용하기 때문에 고르거나 둘 다 사면된다고 했다. 맥 자체도 비싸거니와 거기서 옵션이 붙으면 붙을수록 올라가는 가격에 눈치가 보여 나는 그냥 대부분이 쓰고 있는 루트를 밟았다. 나중에야 그 이야기를 우스갯소리로 했는데 당근마켓팀 CTO인 시피가 말했다.
"그런 거 눈치 보지 마요. 필요한 거, 사고 싶은 거 있으면 그냥 말하면 돼요."
당근마켓팀 일원으로서 당근마켓 사무실을 처음 제대로 밟았을 때, 회사 곳곳에 있는 물건과 아기자기하게 배치된 식물들이 보였다. 전반적인 내부 분위기는 칙칙한 사무실 느낌과는 반대로 활기찼으며 밝았다. 당근 거실을 중심으로 옆에는 커다란 책꽂이에 스타트업, 개발 등 업무와 관련된 책들이 드문드문 꽂혀있었고 그 건너편에는 쇼케이스 냉장고에 여러 국적의 음료수가 빼곡히 들어있었다. 탕비실에는 동날 일 없는 다과들이 가지런히 앉아 사람의 손을 기다리고 있었고, 냉장고를 열면 요거트, 치즈, 버터, 각종 소스, 밀크티 베이스, 빵, 핫도그, 닭꼬치, 구운 계란, 구운 메추리알, 사과 등 '이런 거까지 있다고?'라 생각할만한 것들이 한 두 개가 아니었다.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누구나 자유롭게 요청할 수 있었으며, 주문하는 쇼핑몰에 들어가 직접 장바구니에 넣어도 됐다.
눈치를 많이 보는 터라 몇 주간은 그쪽을 잘 바라보지 않았다. 쇼케이스의 음료는 최대 1일 1개만 먹는 것을 스스로 원칙으로 삼았다.
의견을 표출할 때도 눈치를 보며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다. 대행사에 지낼 때의 버릇이 남아 있는 터라 그런지 당근마켓팀 메신저에 의견을 말할 때 한 문장을 쓰더라도 쓰고 지우고를 반복했다. 같은 의미의 문장을 '요'로 끝낼지 '다'로 끝낼지, '네'로 끝낼지 '넵'으로 끝낼지 같은 문장에서 주는 묘한 뉘앙스를 생각했다.
어떤 때는 내가 작은 실수를 저질러서 관련 업무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서버 개발자 피비에게 개인 메시지(DM, Direct Message)를 보냈다.
"피비, 제프예요. 제가 실수를 했는데 이거 한 번만 봐주시겠어요? ㅠㅠ"
피비는 내가 실수했다, 라고 하는 문제에 대해 해결을 해주시며 끝으로 말을 덧붙였다.
"업무 관련 이야기는 공개채팅으로 해도 돼요. 실수한 것도 전혀 상관없어요. 저희는 DM을 기본적으로 안 쓰기 때문에 참고하세요~"
피비는 끝으로 '실수는 괜찮다!'며 실수에 대한 눈치를 보지 말라며 북돋아주었다.
회의를 할 때는 의견이 있으면 누구나 할 말을 하고 의견을 표출한다. 이거 가만 보면 당연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겠지만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라. 진짜 우리 회사는 내 의견이 반영이 되는지. 또는 의견조차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지. 말할 수 있다면 나는 우리 회사의 한 팀에 리더이거나 밑에 부하 직원을 여럿 둔 상사는 아닌지. 리더(또는 상사)가 맞다면 부하 직원이 표출하는 의견들이 수용되고 있는지. 그 의견들은 아직 업무 물정 모르는 새내기가 지저귀는 귀여운 병아리의 삐약-거림이라 생각하는지, 말이다.
여하튼, 당근마켓팀은 그 속에서 좋은 피드백을 수용하며 서로의 의견을 존중한다. 감정적 태도는 취하지 않는다. 간혹 뜨거운 두 개의 입장이 서로 부딪힐 때 금방이라도 불길이 덮칠 것만 같아도 절대 누구를 무시하거나 무안을 주는 말은 하지 않는다. 우리는 신뢰와 충돌을 중요시한다.
눈치 없는,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눈치 보지 않아도 되는 당근마켓팀에 있으면서 예전에 있던 소극적인 태도와 눈칫밥 먹던 시절을 과감히 청산하게 되었다. 성격, 성향에 따라 소극적인 사람, 적극적인 사람 등이 있다. 이것이 옳고 그르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런 의미보다는 당근마켓팀은 모두의 의견을 수용하고 열려있는 것이다. 이것은 회사 또는 개개인이 타인에게 주는 배려와도 같다고 생각한다.
마지막 문장은 당근마켓팀의 머신러닝팀에 소속되어 있는 매튜가 SNS에서 쓴 글을 인용하여 마치려고 한다(매튜.. 말없이 써서 미안해요).
눈치와 배려는 같은 능력으로부터 나온다. 상대방의 기분을 살피는 능력이다. 하지만 동기가 전혀 다르다. 눈치는 나를 위한 생각에서 나오는 행동이고 배려는 남을 위한 생각에서 나오는 행동이다. 건강한 조직은 눈치가 아닌 배려가 넘치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 당근마켓팀 머신러닝 엔지니어 이웅원(Matthew)님으로 부터..
다음 장에 계속
<당군신화 : 당근마켓을 너무나 사랑하여 '당군'으로 불리게 된 한 남자의 이야기>는 글쓰기 모임 '그치만 글쓰기를 하고 싶은걸'에서 JOBS라는 주제로 진행하는 글입니다. 해당 글은 8주간 진행합니다. 모임에 계시는 분들 개인의 글이 한데 묶여 책으로 발간될 예정입니다.
<잡스JOBS : 직장인실전편>
전국 독립서점에서 찾아보실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