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당군신화(당근마켓 마케터의 에세이집)
제법 목요일 아침은 선선한 게 몸이 가볍다. 아니, 사실 수요일도 목요일과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목요일의 따뜻한 햇살과 아침 바람이 날 상쾌하게 만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발 빠짐 주의. 발 빠짐 주의"
방배역을 알리는 여성의 안내 소리가 들린다. 최근에 읽기 시작한 <칼퇴족 김대리는 알고 나만 모르는 SQL>을 잠시 덮는다. 다음 역이 내 종착지인 서초역이라는 것을 알리는 익숙한 기계음에 자연스럽게 내릴 준비를 한다.
SELECT 열_3-3
FROM 2호선_지하철; *
*SQL(Structured Query Language)은 데이터베이스에서 데이터를 읽고 쓰기 위한 언어이며, 'SELECT 열 이름 FROM 테이블명;'은 '테이블명으로부터 열 이름을 출력하라'는 뜻이다.
지하철 안의 출입구 앞에 서 있던 나는 3-3이라는 숫자가 땅에 박혀 있는 서초역 출입구에 정확히 도킹되었다. 기계음은 '출입문이 열립니다'라는 쿼리를 날렸고, 자연스럽게 내릴 준비를 하던 나는 다른 사람의 등에 떠밀려 그들과 함께 지하철 밖으로 출력되었다.
서초역으로부터 약 3분 간 걸으면 도착하는 당근마켓 사무실의 문을 연다. 손목에 시계를 확인하니 10시 24분을 가리킨다. 사무실은 쥐 죽은 듯 조용하다. 테이블 듬성듬성 앉아 있는 팀원들과 나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자리는 비워져 있다. 당근마켓의 출근 시간은 9시부터 11시까지 유동적이지만 11시가 되어도 비워져 있는 자리는 채워지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그리고 팀원들은 확신한다.
"출근했어요. 나눔의 날 콘텐츠 제작하고 업로드할게요. 그리고 오늘은 광고 소재 쪽에 더 집중해서 만들어 볼게요."
이미 회사 공유 메신저에는 나 말고도 '출근했다'는 메시지와 함께 '오늘 어떤 일을 할 것이다'라는 말을 덧붙인 문장이 층을 이루며 쌓여 있었다. 그렇다. 매주 목요일은 당근마켓 재택근무 날이다.
나는 재택근무 날에도 평소처럼 사무실로 출근을 하는데, 그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집과 사무실이 그리 멀지 않다는 점과 예전에 카페에서 한 번 재택근무를 해봤는데 엉덩이도 아프고 커피도 금방 동이 나버려 두, 세 잔 더 시켜야 할 것 같은 불편함 때문이다. 회사에 오면 먹을 거도 더 많고 커피도 무제한으로 먹을 수 있다. (꼭 그것 때문은 아니지만) 목요일에도 안 갈 이유가 없다.
그리고 재밌는 이유가 하나 더 있는데, 목요일의 당근마켓 사무실은 평소 때의 생김새나 위치나 거리나 당연히 똑같은 사무실임에도 불구하고 그 공간은 왠지 다른 사무실 같다. 조용하고, 몽환적이며 가벼운 바람도 은근히 부는 듯한 게 심리적으로 능률도 올라가는 것처럼 보인다. 평소보다 사람 소리가 덜 들려서 그런 것 같은 게 내 판단이다.
당군으로서 주변에 당근마켓 이야기를 가끔, 아니 자주(또는 많이) 하는데, 매주 재택이라는 이야기를 하면 다들 정말 부러운 눈초리로 쳐다보면서 "와, 좋겠어요!"라고 말하신다. 무엇이 좋아서 좋겠다고 말하는 건지 정확하게 알지는 못한다 — 다음부터는 '왜 좋은데요?'라고 물어봐야겠다 —. 그렇지만 짐작하건대 집, 또는 집 근처에서 할 수 있다는 점과 편함이 보장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거기에 대한 나의 답변 그리고 회사의 답변은 '반은 틀리고 반은 맞다'가 되겠다.
처음 당근마켓에 재택근무가 생기게 된 계기는 꽤나 많은 구성원이 자택으로부터 회사가 멀리 있기 때문에 출퇴근 시에 허비되는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고자 만들었다고 전해 들었다. 구성원에 대한 배려이기도 하지만 업무의 능률성을 포함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복지제도'가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는 오히려 목요일이 되면 더 예민해지고 진지해지고 일에 더 몰두하는 듯하다. 서로가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없는 환경에 놓여있기 때문에 한 마디라도 메신저를 통해 더 하려고 한다(목요일의 메시지 개수는 항상 정점을 찍는다).
당근마켓에서 말하는 복지제도란 개개인의 성과에 최고의 보상을 지급한다거나 휴가의 개수 제한이 없다거나 점심을 제공한다거나 세미나, 스터디, 도서비를 지원한다거나 넷플릭스를 볼 수 있다거나 편의점 부럽지 않은 간식들과 음료수가 가득한 것 등 회사가 오롯이 개인을 위해 주는 지원이라 할 수 있겠다.
반면에 목요일 재택근무, 9시부터 11시까지 유동적인 출근, 아이맥과 맥북을 포함한 최신장비 지원, 전동 높낮이 데스크 사용, 업무에 대한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 스스로 할 일을 판단하는 것 등은 회사가 개인이 업무를 더 잘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항목이다. 즉 개인을 위한 것도 일부 포함되어 있지만 회사의 성장을 전제로 하고 있다.
"퇴근할게요. 나눔의 날 콘텐츠 제작하고 업로드했어요. 광고 소재 6개 만들어서 페이스북 게재했어요. 아, 그리고 오늘 하늘이 참 맑네요."
목요일의 하늘이 유독 다른 날보다 더 맑아 보이는 건 나 그리고 당근마켓이 한 걸음 한 걸음 맑은 날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는 걸 방증하는 게 아닐까. 아, 물론 지금도 여전히 맑은 것은 사실이다.
"발 빠짐 주의. 발 빠짐 주의"
서초역을 방금 지나 퇴근길이라는 걸 실감케 하는 여성의 안내 소리가 들린다. 출근길에 잠깐 읽었던 <칼퇴족 김대리는 알고 나만 모르는 SQL>을 다시 펼친다. 다음 역이 내 종착지인 맑은 날이라는 것을 알리는 소리와 함께 자연스럽게 내릴 준비를 한다.
SELECT 맑은_날
FROM 당근마켓_팀;
다음 장에 계속
<당군신화 : 당근마켓을 너무나 사랑하여 '당군'으로 불리게 된 한 남자의 이야기>는 글쓰기 모임 '그치만 글쓰기를 하고 싶은걸'에서 JOBS라는 주제로 진행하는 글입니다. 해당 글은 8주간 진행합니다. 모임에 계시는 분들 개인의 글이 한데 묶여 책으로 발간될 예정입니다.
<잡스JOBS : 직장인실전편>
전국 독립서점에서 찾아보실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