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_재즈
"복숭아뼈로 듣거나, 귀로 듣거나"
음악을 듣는다는 행위는 무슨 의미를 주는지 묻는 것으로 시작한다.
복숭아뼈로 듣거나, 귀로 듣거나. 재즈는 이제 가끔 바닥에 깔아 놓는 배경 음악으로 쓰인다. 카페나 레스토랑에서 좋은 분위기를 내기 위해서다. 발에 채이는 음악. 그물 구멍이 큰 채로 걷는 것과 같아서 소리는 귀에 담기지 않는다.
음악이 이토록 발에 차이게 된 것은 역시 복제가 쉬워졌기 때문이다. 발터 벤야민이 말했다. 복제가 반복되면 아우라가 사라진다고. 이것은 디지털 세상이 주는 이점의 정반대 지점에 있는 현상이다.
음악이 귀하던 시절을 상상해 보자. 에디슨이 축음기를 만들기 전, 그리고 ‘사의 찬미’가 조선을 휩쓸기 전의 일이다. 악기로 내는 소리나 사람이 부르는 소리를 직접 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귀했을까. 과거의 왕은 행차할 때 음악을 몰고 다녔다. 사람들은 귀한 왕을 보고, 더 귀한 음악을 듣기 위해 왕이 지나는 저잣거리로 몰려들었다. 십 리고 이십 리고 걸어서 말이다. 평상시에는 맨발로 지내다가도 그날만큼은 아껴둔 짚신을 꺼내 신고 걸어왔을 것이다. 왕을 보러, 그리고 음악을 들으러.
음악이 왕처럼 높디높은 것이었던 때를 상상해 보면, 발에 차이는 요즘의 음악은 좀 그렇다. 물론 하느님처럼 비싼 음악은 여전히 존재한다. 45만 원짜리 임윤찬의 연주회도 있고 오아시스의 내한 공연도 있다. 앨범을 사면 그보다는 저렴하게 들을 수 있겠지만, 그래도 음악은 복숭아뼈보다는 귀로 듣는 게 좋다.
재즈와 마약에 시달리는 재즈 뮤지션들에게는 발생학적 비극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미국 잡지 다이제스트에서 이런 농담을 읽은 적이 있다.
“저는 왜 온몸이 새까만가요?”흑인이 하느님에게 물었다.“강렬한 태양으로부터 널 보호하려고 그리 만들었다.”하느님이 친절히 응답하시었다.“왜 제 머리는 이렇게 굵은 곱슬인가요?”흑인은 여전히 의문이 남아 있다.“사자를 피해 덩굴에 들어가도 가시에 걸리지 말라고 내가 그렇게 만들었다.”하느님은 저게 오늘 왜 이리 묻는지 단호하게 답하시었다.“근데 왜 저는 뉴욕에서 태어났나요?”신께서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쌩깠다.
슬프고 비극적 농담이다. 이 농담 마지막 구절에 미안한 신이 그들에게 재즈를 만들게 하시었다. 이렇게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아메리카 아프리칸이 만든 재즈 덕을 보는 것은 우리들이지만, 어쨌든 태생적 비극이 재즈를 만들었다.
재즈는 프랑스의 유산으로 시작되었다. 프랑스 클래식 드뷔시와 라벨의 영향을 받았고 스트라빈스키와 쉰베르크 클래식의 계보를 재즈는 이식받았다. 프랑스 군대가 버린 악기(트럼펫, 드럼은 군대에서 쓰는 악기다. 북은 병사들이 전열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전진할 때 박자를 맞춘다)가 흑인들의 손에 들어가서 재즈 악기로 변했다.
재즈는 뉴올리언스에서 태어났다. 뉴올리언스는 프랑스의 군항이다. 그곳의 공창 거리에서 아메리카 아프리칸에 의해서 만들어진 게 재즈다. 아메리카 아프리칸이 만든 클래식이다. 이들은 위대한 클래식 작곡가와 연주자들과 동일한 존경과 찬양을 받아야 한다. 바흐, 헨델, 모차르트, 베토벤처럼 찰리 파커도 마일스 데이비스도 그런 추앙을 받아야 한다.
“재즈를 추앙해.”재즈는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한다.
디지와 버드 앨범은 칭송받아 마땅하다. 비밥의 창시자들이다. 음악을 만드는 것도 위대한데 장르를 만들었으니 얼마나 위대한가. 강렬하고 세다. 버드와 디지는 ‘분다’보다 ‘불어 제친다’가 적확한 표현이다. 그냥 어디 깔고 듣는 음악이 아니다. 집중하고 날 세우고 들어야 한다. 초보라면 더욱 그렇다. 나도 집중해서 들으려고 까치발을 한다.
버드는 알토 색소폰이다. 디지는 트럼펫이다. (디지의 트럼펫은 좀 다르다. 위로 약 45도 기울어져 있고 약음기가 달렸다.) 도서관에 가면 LP 감상실이 있다. 영상이 없는 앨범이 갖는 매력, 어려움이다. 트럼펫 소리와 색소폰 소리를 구분하면서 들어야 한다. 버드가 연주하는구나 디지가 연주하는구나 알아차리기가 초보는 쉽지 않다. (못 맞추면 어떠냐, 하모니니까 섞인 음악의 매력을 들어도 된다.)
그렇게 집중하면 더 음악에 심취할 수 있다. 눈을 멈추고 귀에 온 신경을 쏟아보자는 것이다. 아날로그적 매력이라는 것이다. 멀티플하지 않고 단선적 매력. 운이 좋으면 모노 녹음으로 들으면 더 맛이 난다. 나팔 소리 말고 뒤에 버틴 드럼 사운드도 들어보자. 나는 밴드 음악이 좋다. 거기에는 드럼이 있다. X 재팬의 요시키를 봐라. X 재팬의 영광 있으라. 진정한 대중음악, 밴드 음악은 드럼의 영도 아래 시작된다.
드럼은 북과 심벌이다. 드럼은 킥 드럼, 스내어 드럼이 추가되고 심벌도 두 개가 겹쳐 발로 밟는 심벌과 한 개의 심벌이 있다. 재즈를 듣다 보면 스내어 드럼 소리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사삭 사삭 모래 흐르는 것 같은 소리.
버드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 <버드>에서 심벌즈가 날아가는 장면이 반복된다. (감독이 클린트 이스트우드다. 공화당 지지자 백인 감독은 미국의 가장 저층의 어둠을 드러낸다. 아이러니. 카메라는 감독의 눈이자 질문이다. 어디를 무엇을 보는지를 영화를 보면서 관객도 찾는다. 이런 영화가 줄어든다. 아우라가 사라져서다.)
스윙 밴드에서 어린 버드가 데뷔하는 날 밴드와 버드는 어긋난다. 답답했는지 드러머가 심벌을 버드에게 던져버린다. 바닥에 챙하고 떨어져 소리가 나자 버드의 연주가 멈추고 웃음거리가 된다. 하지만 조만간 스윙은 가고 비밥이 온다. 비밥의 히어로는 버드와 디지다.
비밥은 뭐고 스윙은 뭐지? 들어보면 몸이 춤추면 스윙, 자꾸 엇박이 나면 비밥이다. 내 구분법이다. 음악이 나한테 뭘 주나 그 답을 찾자. 음악을 듣는 행위가 나에게 어떤 가치가 있나 생각해 보자.
찰리는 악보를 볼 줄도 쓸 줄도 몰랐다. 얼마나 슬픈 탄생인가. 재능은 위대하나 환경은 처참했다. 이미 10대 시절부터 마약을 시작했다. 평생 약물 중독 고통에서 헤맨다. 피아노를 치기 전까지 나도 악보를 볼 줄 몰랐다. 음악 듣는 데 무슨 지장이 있겠나. 음악 눈으로 말고 귀로만 들어보라. 다른 결이 보인다.
블랙핑크를 안무 없이 들어봐라. 그래도 좋다면 정말 아재 팬 맞다. 불쌍한 뉴진스를 들어봐야겠다. 영화에서 뉴욕 거리의 빨간 옷을 입은 삐끼가 소리친다.
“미래의 음악 비밥을 들으세요.”
K-팝은 미래 음악인가. 아재들의 아이돌 선생님이 크리스마스이브에 하늘로 올라갔다. 그의 마지막 책을 사서 K-팝 공부를 시작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