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달리기
4. 달리지 못할 때의 달리기
달리기를 하면 가능한 한 많이 달리고 싶어진다. 피리 소리에 취해 끝없이 춤을 춰야 하는 몸이 된 것과 비슷하다. 달리기는 매일 무한히 하면 안 되나. 세계 최고의 시스템을 가진 에티오피아 선수들도 세게 달리는 날 3일 사이에 가볍게 달리는 날 3일이 끼어 있고 반드시 일요일은 쉰다. 잘 관리하는 게 장거리 달리기 운동의 중요한 노하우다. 엘리트 선수가 아닌 일반인도 마찬가지다. 잘 쉬는 게 중요하다.
달리지 못할 순간이 생긴다. 부상일 때. 이때는 반드시 달리기를 하지 말아야 한다. 부상일 때 욕심을 내면 더 큰 부상이 오고, 부상에 시달리면 달리기 자체를 포기하게 된다. 부상뿐 아니라 부상 신호가 오면 신호를 알아채고 달리기를 멈춰야 한다. 장요근이 아파서 약을 먹었다. 2주간 쉬라고 했는데 1주일만 쉬고 달렸다. 장요근 부상은 완치가 되지 못하고 자꾸 아프다. 아파서 못 뛰는 것은 없다. 장요근은 뛰어서 아프기보다 책상에 오래 앉아 있으면 아프다.
시간이 없어서 못 뛴다? 하루에 9시간을 노동에 쓴다. 7시간 일하고 2시간은 이동 시간이다. 그러면 시간이 없어서 못 뛰는 일은 없다. 의지가 문제다. 뛰는 데는 의지가 필요하다. 겨울은 그렇다. 추위가 엄포를 놓으면 겁이 나게 마련이다. 나는 추위보다 나갈 때 차려입는 것이 더 의지를 꺾는다. 양말, 레깅스, 겉바지, 달리기 반팔 티, 긴팔 티, 바람막이, 경량 패딩, 워머, 귀마개, 털모자, 털장갑. 이 모든 것을 입고 뛰고 나서 벗고 정리하고 빨래하는 것도 귀찮다.
하지만 이 정도 귀찮음은 이겨낼 수 있다. 가을부터 달려서 겨울을 지난다. 겨울이 많이 뛰기 좋다. 봄, 가을도 좋지만 겨울에 많이 달려야 한다. 겨울은 농사의 봄 같다. 그러니 지금 달려놔야 일 년 달리기가 잘 된다. 언젠가 풀코스에 도전하기로 하였으니, 의지가 충만하다.
의지가 없을 때는 이 말을 떠올리면 된다. "왼발, 오른발."다른 거 말고 한 발, 한 발. 발에만 집중하다 보면 목표를 완성할 수 있다는 말이다. 'Left foot, Right foot'이라고 쓰인 티셔츠가 있다. 이 말과 티셔츠는 토미 리브스라는 마라토너로부터 기원했다. 그는 울트라 마라톤도 하는 철인이다. 2017년 보스턴 마라톤에서 2시간 18분으로 16등을 했다. 어마어마한 기록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5개 국어에 능통한 언어학자이자 인류학자다.
그런 그가 림프종 진단을 받았다. 살아있는 게 기적일 정도의 항암 치료를 겪고 20%의 폐 기능만 가지고 퇴원했다. 187cm의 마라토너는 체중이 40kg으로 줄었다. 평생 인공호흡기를 착용해야 한다고 했지만, 그는 인공호흡기 없이 2021년 뉴욕 마라톤에 참가해 9시간 18분 57초의 기록으로 완주했다. 이런 몸으로도 완주가 가능하다면, 이보다 건강한 몸의 사람이 풀코스를 달리지 않는다는 것은 비윤리적이라고 느낀다. 몇 시간이 걸려도 언젠가는 풀코스를 달릴 것이다. 달리지 않을 이유가 없다.
날씨 탓도 우습다. 트레드밀이 있는 세상이다. 태풍, 폭우, 폭설이 아니면 못 달릴 날씨는 없다. 추위는 오히려 땀이 덜 나서 달리기에 좋을 수 있다. 달리지 못할 이유는 없다. 감기가 아니면. 감기는 너무나 가혹한 장난 같다. 부상도, 시간도, 의지도, 날씨도 문제없는데 감기에 걸렸다. 이 무력감, 이 분노.
“감기면 달리면 안 된대?” 나한테 자꾸 묻는다. 검색을 하면 달리지 말라고 한다. 다시 또 묻는다. 못 달리는 몸은 무겁고 못 달리는 맘은 답답하다. ‘달리지 못하는데 외롭다.’ 너무 먼 것을 억지로 갖다 붙인 것 같은 억측. 원자와 블랙홀이 서로 연관 있는 것 같다는 억측.
문장을 뒤집자. 외로워서 달린다. 외롭지 않기 위해서 달린다. 이렇게 해 놓으면 문장이 된다. 달리기가 외로움을 만들지 않는다. 외로움을 처리하는 수단으로 달리기는 쓸모가 있는 듯하다. 외롭지 않으려고 러닝을 한다. 혼자가 되는 건 고통스럽다. 혼자라는 것이 조명이 깜빡이듯 반복해서 상기되는 순간은 힘들다. 하지만 달리기는 스스로 혼자 되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달리기는 결국 자기 다리 말고는 대신해 줄 것이 없다.
모든 것은 사유의 도구다. 깨달음을 위한 도구는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내가 천착하는 이유를 묻고 그 반응을 탐색하며, 그것이 어떤 형질로 나에게 작용하는지를 바라보는 것. 이것이 색즉시공(色卽示空)의 세계를 향한 첫발이다. 달리지 못해서 외롭다는 것은, 달리기가 내 마음에 하나의 파동을 일으킨다는 뜻이다. 모든 존재는 홀로 있지만, 그것이 곧 외로움의 완전한 이유는 아니다. 외로움은 홀로 있는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다른 것에 기대려는 것으로부터 오는 것인지 탐문해 본다.
"외로움이 뭐예요?""혼자 달리는 거요.""원래 달리기는 혼자 하는 거 아니에요?"
달리는 동안 몇 가지를 지속적으로 확인해야 한다. 우선은 속도다. 오늘의 달리기가 가속주 훈련이냐 지속주 훈련이냐에 따라 갈리겠지만, 사실 이런 용어조차 내게는 과분하다. 내 목표는 그저 재미나게 달리는 것, '해피런'이나 '펀런' 같은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말랑한 용어로 훈련 분위기를 내다보면 금세 지치고 만다. 나는 그저 달리는 사람, 달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일 뿐이다. 달리기를 남보다 잘하는 사람이 되는 것에는 관심도 없고,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속도는 확인해야 한다. 페이스를 유지해야만 정해진 시간 동안 걷지 않고 끝까지 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생긴 러닝 전용 와치 '뉴런 21'을 틈틈이 체크한다. 신기하게도 의식적으로 조절하지 않으면 속도는 자꾸 빨라진다. 가속의 욕망일까, 아니면 막장을 향한 질주인가. 혹은 자기를 파괴하고 싶은 본능인지도 모르겠다.
속도를 챙기면서 심박수도 챙긴다. 숨이 차지 않게, 숨이 차오르면 즉시 속도를 늦춘다. 머릿속이 바쁘다. 이 와중에 상기해야 할 동작들이 줄을 잇는다. 몸을 세울 것. 등이 굽으면 몸이 앞으로 쏠리기 때문이다. 시선은 발밑이 아니라 15미터 앞을 보려 애쓴다. 팔치기도 중요하다. 신경 쓰지 않으면 팔 동작은 금세 작아지고 에너지는 낭비된다. 느리게 뛰더라도 팔 동작만큼은 정확하게. 매 순간 확인해야 할 것들 천지다.
하지만 달리기란 묘해서, 어느 정도 적응도가 높아지면 이 바쁜 와중에도 다른 생각들이 비집고 들어온다. 내가 달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잠시 잊는 순간들. 소설의 한 줄 문장이 떠오르기도 하고, 블로그 주제가 부상하기도 한다. 떠나간 옛사람이 잠시 왔다가고, 파랗게 질린 주식 계좌를 위한 대책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리고 문득, 바빠서 만날 수 없는 연인이 보고 싶다는 기분이 든다.
이때다. 보고 싶다는 기분은 곧 그리움이다. 그 그리운 순간, 마치 <고독한 미식가>의 주인공이 배고픔을 느끼는 장면처럼 세 컷의 인서트가 반복된다. 미식가가 "하라가 헷타(배가 고프다)"라고 읊조리듯, 나 역시 그리운 사람을 멀리 두고 혼자 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다. 그리고 입 밖으로 내뱉는다.
"외롭다."
입안에 머금은 그 문장이 뇌를 타고 온몸으로 느껴지려는 찰나, 역설적이게도 통증이 솟아난다. 약한 부위나 과사용된 부위가 먼저 비명을 지른다.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제치고 '아프다'는 감각이 솟구친다. 발목, 발바닥, 혹은 거위발 건염 부위. 통증의 강도를 측정하고 촉각을 세우느라 온통 몸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찬다.
그러면 내 몸은 난데없는 관심에 흡족해하며 속삭이는 것 같다.'이보게, 평상시에도 이렇게 나에게 관심을 갖게나. 그러면 외롭다는 생각이 들 틈 따위는 없을 걸세.'
정신을 붙잡고 풍경을 본다. 한강의 물길, 탄천의 잔잔함, 가라앉는 비행기. 그러면 아픈 것도 지나가고 새로운 공기가 폐를 보듬는다. 외로울 순간은 없다. 울트라 마라톤처럼 사막 같은 고독이 기다리는 코스라면 모를까.
이번 주에는 '피크민 동맹'과 함께했다. 걷기와 꽃 심기가 합쳐진 게임이다. 매주 10만 보 걷기 퀘스트를 함께 하는 이들에게 내 달리기는 큰 도움이 된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는 기분 덕분에 달리는 동안은 외롭지 않다.
결국 외로움은 달리지 못할 때 온다. 강제로 못 하게 되면 달리기가 그립고, 그 그리움이 외로움으로 결빙된다. 감기약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그만큼 나았다는 뜻이다. 더는 외로워할 수 없다. 달리러 간다. 달렸다가 아프면 혼나겠지만, 안 아픈 척할 준비는 되어 있다.
ps. 달리지 못하는 동안 읽은 책들
무라카미 하루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성경 보듯 틈날 때마다 본다.
정세희, <길 위의 뇌>: 뇌과학자가 쓴 달리기 책.
<달리기 인류학>: 에티오피아 엘리트 선수들을 탐구한 책.
못 달릴 때는 공부. 마라닉 8기가 되어 99명의 단톡방에서 사람들이 달리기 이야기를 떠드는 것을 구경하며 감기 기운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