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하의 온도

얼음은 물질로만 말하지는 않는다

by 지온

동굴의 온도


여름에도 동굴 안은 서늘하다. 바깥의 열기가 숨 막히게 올라붙어도, 입구를 몇 걸음만 들어서면 공기의 결이 달라진다. 벽은 차갑고, 공기는 고요하다. 온도계는 놀라우리만큼 일정한 숫자를 가리킨다. 그 온도는 바로 그 지역의 연평균 기온과 거의 같다.


두꺼운 바위가 여름의 열기와 겨울의 냉기를 차단하는 완벽한 단열재가 되기 때문이다. 외부와 단절된 동굴은 계절의 변화를 들이지 않고, 수년 동안 그 땅의 평균적인 온도로 안정된다. 그래서 동굴의 온도는 오늘의 날씨가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된 지역의 체온이다.


빙하 속에도 그런 멈춘 계절이 있다.


동굴(아래)과 빙하를 시추하고 생긴 시추공(borehole; 위)


얼음의 체온


얼음은 단순히 차가운 물이 아니다. 눈이 쌓이고 다져져 만들어진 얼음은 그 안에서도 미세한 온도 차이를 품는다. 영하 20도의 얼음과 영하 10도의 얼음은 다르다. 그 차이는 눈이 내린 계절의 기온, 얼음을 누른 압력, 땅속에서 올라오는 지열까지 모든 조건이 겹쳐 만들어낸 결과다.


인간의 기준으로는 그저 차가운 덩어리이지만, 얼음은 열을 품고 있고 그 열은 흐른다. 그 미세한 온도 분포를 따라가면 얼음이 얼마나 오래 그 자리에 머물렀는지, 어디서부터 흘러왔는지, 그리고 지구 내부가 어떤 열을 품고 있는지를 읽을 수 있다.


남극의 빙하 표면에서는 여름의 따뜻함과 겨울의 한기가 오가지만, 깊어질수록 얼음 속 온도의 변화폭이 점점 작아진다. 약 10~15미터 아래에서는 계절의 흔들림이 완전히 사라지고, 수년에서 수십 년 동안의 기온이 부드럽게 섞인 ‘시간의 평균층’이 된다. 이 깊이의 온도는 대기의 평균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서, 과학자들은 기상관측장비가 설치되지 않은 지역에서는 이를 그 지역의 연평균기온의 지표로 삼는다.


이 층의 온도는 단순한 평균값이 아니라, 빙하가 그 자리를 지켜온 기후의 흔적이다. 얼음의 미세한 온도 변화 속에는 시간에 따른 기후의 변동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얼음 속 열의 지도


과학자들은 얼음에 구멍을 뚫고, 가느다란 온도 측정선을 천천히 내려보낸다. 이렇게 시추공에서 얻은 온도 데이터는 수백, 수천 미터 깊이의 얼음 속 열 분포를 완만한 곡선으로 드러낸다.


남극장보고과학기지 인근 스틱스(Styx) 빙하에서는 바로 이 방법을 통해 지난 수세기의 표면 온도를 복원했다. 우리나라 연구진이 수행한 이 시추공 온도 분석 결과, 17~19세기 평균에 비해 20세기 표면 온도가 약 1.7℃ 높아 온난화가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얼음은 이렇게 한 지역의 기후를 간직한 채, 시간의 흐름 속에서 느리게 식고 데워진다. 하지만 그 온도 곡선은 단순한 숫자의 나열이 아니라, 해독이 필요한 암호 지도와 같다. 그 암호를 풀기 위해 과학자들은 복잡한 수학으로 계산을 이어간다. 얼음 아래에서는 땅속 깊은 곳의 지열이 얼음을 서서히 데우지만, 빙하의 흐름에 따라 얼음이 얼마나 내려앉고 밀려오르는지, 그 느린 움직임이 때로는 지열보다 더 크게 작용하기도 한다. 그 미세한 차이를 해독해야 비로소 얼음의 시간이, 그 안에 담긴 기후의 이야기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과학자들은 이 열의 지도를 통해 지구 내부의 열 흐름, 빙상의 안정성, 해수면 상승 예측의 기초 단서를 읽어낸다. 온도라는 물리량 속에는 얼음이 지나온 계절과 아직 오지 않은 미래가 함께 숨어 있다.


빙하의 온도 측정(위)과 깊이에 따른 온도 변화(아래)(출처: 극지연구소 보고서)


빙하의 깊은 곳, 지열의 세계


빙하 속의 열은 매우 느리게 움직인다. 표면의 열은 수백, 수천 년에 걸쳐 서서히 아래로 스며든다. 깊이 100미터 아래에는 수백 년 전의 온기가 남아 있고, 1000미터 아래에는 빙하기의 열이 아직 잠들어 있다.


얼음은 열을 잘 가두는 물질이다. 대기의 열은 몇 미터 깊이에서 거의 차단된다. 지구 내부에서 올라오는 지열도 얼음 아래에 갇혀 밑면에 머문다. 이 열에 압력과 마찰열이 더해지면, 얼음의 밑면이 녹기 시작한다. 그렇게 생긴 물이 얼음과 암반 사이에 얇은 막을 이룬다.


그 물이 고여 만들어진 곳을 빙저호(subglacial lake)라 부른다. 남극의 보스토크 호처럼 수십만 년 동안 외부와 단절된 호수도 있지만, 모든 빙저호가 고립된 것은 아니다. 얼음 밑에는 호수와 수로가 연결된 빙저 수계가 존재해, 물이 주기적으로 이동한다. 어떤 곳에서는 이 흐름이 멈추지 않아, 수년마다 호수가 비워지고 다시 차오른다. 이때 표면의 높낮이가 수 미터씩 오르내리는 모습이 인공위성에서도 관측된다. 이렇게 확인된 활동성 빙저호가 남극에만 230개가 넘고, 새로 발견되고 있다.


보이지 않는 물길이 얼음의 밑바닥을 따라 흐르며, 빙하의 느린 숨결이 된다. 겉으로는 멈춘 듯 보이지만, 그 아래에서는 열과 물이 쉼 없이 교차하며 빙하의 세계를 움직인다.


발견된 남극 빙저 호수들(출처: Wilson et al. (2025), Nature Communications)


미래의 열, 오늘의 기록


오늘 우리가 더하는 열은 빙하의 가장 얕은 층에 새로운 기록으로 남는다. 그 온기는 금세 사라지지 않는다. 수백, 수천 년의 시간을 지나며 아주 느리게 얼음 깊은 곳으로 스며든다.


그 느린 열의 흔적을 미래의 과학자들은 오늘의 기후로 읽어낼 것이다. 빙하는 그렇게 현재의 열을 미래의 시간 속에 봉인한다. 그 안에는 지금 우리가 만든 흔적과, 아직 오지 않은 계절의 온기까지 함께 잠든다.


지금의 온도는 먼 훗날까지 남을 지구의 미열이다. 얼음은 물질이지만, 그 안에는 시간과 열이 함께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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