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이름
그놈은 주로 사람의 어깨나, 머리 위에 앉아 있기를 좋아한다.
반면 재미가 없어지면 한 순간에 개미만한 크기로 줄어들어 어디론가 사라진다. 아마도 다른 사람에게 들러붙는 모양이다. 나에게 들러붙은 놈도 어디서 온지는 모르나 처음엔 손가락 마디만 했다.
난 한동안 거울보기를 꺼려했다. 그놈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이혼 도장을 찍고 나서는 더 크게 보였다. 손가락 마디 만하던 놈이 조금씩 자라기 시작했다. 하루하루 자라나는 그놈은 무서워하는 나를 보며 웃거나 가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따금 떼어 내보려 안간힘을 썼지만 거울 안의 그놈은 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미움을 먹고 자라는지 커다란 혹처럼 자라났다. 그 모습을 들킬까 봐 주변 사람들을 피했다. 그 결과 모두 날 무뚝뚝하고 냉정한 사람으로 보았다. 사람들은 모두 얕은 관계로만 내 곁에 머물렀고 그로 인해 외로운 때도 있었지만 난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 감정을 주고받지 않아야 내가 상처 입을 일도 상처받을 일도 없어진다는 걸. 놈은 이 제 내 등까지 내려왔다.
놈은 눈치가 매우 빠르다. 미묘한 얼굴의 꿈틀거림만으로 그것이 분노인지 아닌지 알아차렸다. 나조차 내가 무슨 마음인지 혼란스러워할 때 그놈은 어깨 뒤로 고개를 내밂으로써 답을 알려줬다. 내 등 전체를 덮을 만한 크기가 되자 놈은 얇고 긴 팔을 내 목에 둘렀다. 난 놈을 아기처럼 등에 업고 다녔다. 체육시간에 달리기를 할 때마다 뒤처지는 나를 못마땅하게 쳐다보는 선생님에게 난 심장이 안 좋다고 말했다. 등 뒤에서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렇다고 놈이 마냥 나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잰 아니었다. 지갑에 돈이 5000원밖에 없다고 한 살 많은 형들에게 웅크려 맞을 때 그는 얇고 긴 팔로 주머니에 든 커터칼을 꺼내려는 내 손을 쥐며 말했다.
‘ 아직은 아냐. 서두르지 말아.’
어둠 속에서 씩 드러내는 그놈의 웃음을 보고 난 정신을 차렸다. 그 순간만큼은 옆에 있어준 놈이 고맙기까지 했다.
어머니의 방에 빈 술병이 늘어날수록 놈의 크기도 점점 자라났다. 놈은 더 이상 내 등으로 가려지지 않았다. 어머니의 곁엔 어머니와 비슷한 키의 또 다른 놈이 앉아있었다. 어머니와 나는 서로의 놈들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수가 점점 줄어드는 나 대신 어머니는 그놈과 수다 떨기를 좋아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집을 나설 때에도 어머니는 바닥에 누워 그놈에게 아버지와의 첫 데이트 이야기를 해주고 있었다. 술에서 깬 어머니에게 수십 통의 전화가 걸려왔지만 받지 않았다. 일주일이 지나자 쉼 없이 울리던 전화기도 잠잠해졌다. 어머니를 걱정하진 않았다. 어머니도 나를 걱정하지 않는 것 같았다. 놈은 어느새 내 어깨 높이까지 자라 있었다.
택배기사 면접을 보러 찾아간 회사엔 저마다 눈에 띄는 크기의 놈을 어깨에 메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 곳이 나에게 맞는 직장이라 생각했다. 무표정으로 나의 장점이 무엇이냐 물어보는 면접관에게 무심코 내 팔은 4개라고 말할 뻔했다. 난 무거운 것을 잘 들 수 있다고 대답했다. 면접관은 내가 어려서 맘에 든다고 했다.
놈은 점점 커져 내 등 뒤로 발이 질질 끌렸다. 앞으론 택배를 들고 뒤론 그놈을 업으며 땀을 뻘뻘 흘리는 나에게 놈은 눈을 빛내며 말했다.
‘ 내 안에 들어오는 건 어때? 훨씬 편할 텐데.’
놈은 내가 되고 싶어 했다. 그런 놈에게 난 웃어보였다. 사실 놈은 내 허락 따위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입을 벌려 나를 삼키면 그만이었지만 나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 했다. 내가 말이 없자 놈은 일부러 몸을 축 늘여놔 나를 더 괴롭혔다. 허리를 굽히고 낑낑대면서 놈을 던져버리고 싶었지만 이미 때는 늦어버렸다. 그놈의 배와 내 등이 붙어버린 것이다. 놈과 난 이제 한 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