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에는 나이가 없다.

가르침에도 나이가 없다.

by 비니하나

학창 시절 독서목록에 올려두었던 사피엔스를 최근에 정주행 하고 있다.


현 인류(호모 사피엔스)의 역사를 인지혁명 - 농업혁명 - 과학혁명 순으로 해설하는데,

그 첫 단추인 인지혁명은 사피엔스라는 종족 특유의 창작물인 '허구적 이야기'를 구심점으로 구축되는 사회적 집단 체계로 시작된다.


'사회적 동물'이라는 칭호에 걸맞게, 인간은 무수히 많은 크고 작은 이야기들을 창조해 서로를 엮어 협동이 가능한 조직과 그 안에서의 효율적인 시스템적 분업으로 각종 도구와 전략을 비롯한 문명의 발전을 이루어 현 지구의 지배종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거대한 이야기를 만들어 타종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현 인류는 하나의 종만이 남았지만,

그 안에서 무수히 많은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생성되어 매 순간마다 속속들이 분열하고 있다.


'사회적'동물인 인간 고유의 능력인 '이야기'는 우리를 하나로 뭉쳤지만,

사회적'동물'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안에서 너와 나의 역할을 구분했다.


그렇게 공동체의 효율적 존속을 위해서 만든 분업 체제에 의한 역할 차이가 집단 내 서열을 유도했다.


모든 인간 조직에는 우두머리가 존재하며,

해당 집단의 통치자에 의해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발생했고 각 사회의 존망을 결정해 왔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왕권들이 몰락하고,

때때로 수많은 정치가들이 옹호와 지지를 받는 것은,

권위 혹은 권력을 어떻게 개인이 아닌 집단 전체를 위해 합리적으로 활용하였는가로 평가된다.


이러한 권력자의 합리적 역할 수행을 현대 사회에서는 리더십이라고 칭한다.


그리고 현명한 지도자의 자세에 대해 논할 때 널리 쓰이는 밈이 보스와 리더의 차이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아래와 같은 그림이다.



좌: m.blog.naver.com/kzaan/221589340593, 우:www.teamblind.com/kr/post/%EB%B3%B4%EC%8A%A4%EC


왼쪽의 그림을 고등학생 때 한 강연에서 보았던 기억이 있다.


당시에는 단순히 보스는 권력을 행사해 일을 시키는 사람 / 리더는 솔선수범을 보이며 이끄는 사람으로, 각각을 지양할 사람/지향할 사람 정도로만 이해했다.


세월이 지난 뒤 해당 밈을 보고 새롭게 찾아낸 포인트는,

(그림작가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른쪽 그림의 경우 보스든, 리더든 일을 하는 세명은 동일하게 웃고 있다는 것이다.


본래라면 말보다는 행동으로 직접 솔선수범하는 리더가 구성원들을 감동시키기 위한 더 매력적인 '이야기'가 될 것이라는 의도지만,

만에 하나 보스도 충분히 그럴듯한 '이야기'를 통해 노동자들로 하여금 웃으며 일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럴 수 있는 이야기의 구성 요소가 바로 소통과 납득이 아닐까.


인간 사회의 모든 이야기의 형태는 결국 소통의 방식이고,

각 이야기의 내용은 타인의 마음을 동요시키려는 납득과 설득에 목적이 있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내가 현재까지 살며 경험한 모든 인간 집단에는 서열이 존재하고, 일방적 권위/권력의 행사가 당연했다.


가정에서의 형, 누나, 친척, 부모님과 조부모님들

초/중/고등학교에서의 선배님들과 선생님들

종교에서의 권사, 장로, 목사님들과 신부, 추기경, 교황님들

대학의 선배님들, 교수님들

군대의 선임들, 간부들

회사의 상사, 임원들


내가 여태껏 속해본 모든 집단은 동급생 친구들과의 몇몇 친목 모임을 제외하고서는 모두 서열과 권위가 존재했다.


한 조직이 효율적으로 굴러가기 위해서는 합리적인 판단과 결정이 있어야 하는데,

나이가 많다는 것은 곧 경험이 많고 이를 바탕으로 더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장한다.


그렇지만, 현대 사회의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삶의 범위는 매우 광활해졌다.


과학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새로운 이동수단과 통신수단을 비롯한 기기설비와 전자 장치가 개발되었고,

네트워크 기반으로 전파되는 문화의 흐름이 시시각각 바뀌며 요동친다.


더 이상 나이가 많다고 지식이 더 많거나 더 넓은 경험을 해봤다고 단정 지을 수 없으며,

기존의 문화나 시스템은 이미 사라졌을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다.


따라서, 현대 사회에서는 나이, 직위, 권력과 상관없이

배움을 놓는 순간,

소통의 실마리를 놓치게 된다.




반대로, 배움에 필요한 가르침은 어디에서 올까.


인간은 어머니의 뱃속에 자리 잡은 순간부터 태교로 배움이 시작된다.


내 생각에, 한 개체가 배움을 시작하는 순간은,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생기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대부분의 인간 사회는 서열과 권위로 가르침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한 자격을 제기한다.


이러한 사회적 모순에 대한 의문점을 대부분의 인간이 한 번씩 느끼는 분명한 시기가 있다.


바로 사춘기다.

흔히 사춘기가 찾아오며 10대들은 부모님/선생님과 말이 안 통한다며 답답함에 소통을 거부하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낸다.


10대가 되는 동안 축적된 배움의 양이 세대 간의 문화적 차이를 인지하게끔 하고, 아직 어리숙한 소통 능력을 짜내어 미완성인 본인만의 가치관을 피력해보려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인간 사회가 이미 갖춘 시스템은 견고히 정립되어 있고, 중간에 갑자기 생겨나 태어난 우리는 그 흐름에서 벗어나기 불가능하다.


태어난 환경 속 한정된 자원을 쟁취해야 하는 경쟁 체계에서 우리들의 미성숙한 가르침의 도전은 종종 무시된다.


그러한 무시를 이겨내지 못한 채 답답해하며 “엄마는 아무것도 몰라”라며 가르침을 포기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이는 어쩌면 일방적으로 배움만 받아오느라, 가르쳐 볼 경험이 부족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따라서 현대 사회의 우리에겐, 서로 배우는 자세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든 당돌하고 친절하게 가르치는/배움을 줄 수 있는 연습이 분명 필요하다.




자, 이제 앞 선 이야기들을 연결해 보자면,


바람직한 리더십의 발현을 위해서는 구성원 간의 소통납득이 필요하다.


소통을 위해서는 서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며 이는 배움의 노력을 바탕으로 한다.


그리고 효율적인 배움을 위해서는 친절한 가르침이 필요하다.


모두가 배우려고만 하면, 모두가 배울 수 없다.


훌륭한 리더를 만들 수 있는 것은,

리더 스스로 배우는 자세를 잃지 않는 것과

리더에게 당돌하고 친절하게 가르침을 줄 수 있는 팔로워가 아닐까.


바람직한 인간 사회는 서열과 권위에 의한 효율성 보다 서로를 납득시킬 수 있는 소통의 유무이다.




세대/성별/종교/인종/문화 간의 갈등 해소는

서로 겸손히 인내하며 배우고,

선뜻 친절하게 가르치려 하는,

소통의 자세에 있지 않을까.



인간의

객관적 죽음이 사람들에게 잊혀질 때라면

주관적 죽음은 스스로 배움을 멈출 때가 아닐까.


그리고 배움의 자세만큼이나 가르침의 자세 또한 중요해진 시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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