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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론 Apr 05. 2024

감정의 계단

에세이

월요일과 수요일 수업은 1시간 15분짜리 수업이 2개밖에 없어서 비교적 여유로운 요일이다. 시간대도 10시 반에서 시작해서 1시 15분이면 2개 수업이 모두 끝난다. 첫 수업이 끝나고 15분 후에 바로 다음 수업이 시작하기 때문이다. 강의실도 동일한 건물에서 한 층 계단으로 내려가기만 하면 된다.


이런 요소들을 의도하고 강의 일정을 짠 건 아니었지만, 4주 동안 학교를 다녀보니 그런 요소들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내가 이처럼 대단한 시간표를 의도치 않게 만들었다는 사실에 괜한 뿌듯함이 더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


교수님 두 분의 강의력 자체도 나쁘지 않아서 교수님과 눈을 마주친 상태로 다른 생각을 한다거나, 교수님의 말씀을 필기하는 듯이 가끔씩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른 할 일을 하는 등 마음이 불편한 행동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또한 아주 맘에 든다.

특히나 두 번째 강의는 개인적으로 굉장히 재밌고, 또 유익하기도 해서(의미와 재미를 동시에 얻기는 참 쉽지 않은데 말이다) 몰입하다 보면 금세 강의가 끝날 시간이 된다. 수업이 끝나기 5분 전부터 강의실 이곳저곳에서 노트북을 접는 소리, 의자가 뒤로 끌리는 소리, 필기구를 집어넣는 소리 등이 들리면 신나게 강의를 하시던 교수님도 뒤쪽 벽에 걸린 시계를 힐끔 훔쳐보시고는 다음 내용을 간단하게 언급한 다음 "이 부분은 다음 시간에 공부하도록 하죠."라며 강의를 급마무리하신다.

그 멘트 뒤에는 "질문 있으신 학생 있으세요?" 그리고 "네, 그럼 오늘 수업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가 연이어 발사된다. 모두가 강의실에서 한시라도 빨리 나가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다 갖춘 그 상태에서 모든 구성원들의 탈출 시기를 늦출 용기, 그 미움받을 용기를 가진 이는 아직까지는 없는 듯했다.

교수님의 마무리 멘트는 항상 몇몇 학생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내는 소음에 묻혀버린다. 그 상황이 썩 내키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괜히 화를 내기도 싫고, 분노를 쏟은 대상도 특정할 수 없기도 해서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간다. 강의를 진행하시는 교수님도 그 상황을 별 대수롭지 않게 넘기시는 것 같은데, 내가 괜히 나서서 '예의'나 '태도'를 들먹이며 찡그린 표정을 유지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과 감정을 정리하고 나면 안경을 안경집에 넣고, 노트북 전원을 끄고, 주섬주섬 물건들을 가방에 넣고, 마침내 그 가방을 메고 일어선다. 뒤를 쓱 돌아보면, 좀 전까지 사람들로 북적였던 강의실은 어느새 한적해져 있다. 열린 강의실 뒷문 너머 복도에서는 방금 강의실을 빠져나간 인파들의 발소리와 말소리가 점점 작고 희미하게 들려오는데, 그들이 내는 여러 가지 소리들이 옅지만 규칙적인 발소리로 변하는 게 확인되는 순간에 강의실을 나선다.

좀 전에 강의실에서 우르르 나온 인파들이 계단과 엘리베이터에서 몇몇의 소그룹으로 갈라지고, 그 갈라진 소그룹이 내게서 충분히 멀어졌을 때, 그래서 서로를 알지 못하는 낯선 개인들이 그저 '계단을 내려가려는' 목적 때문에 계단에서 만날 수밖에 없을 때, 비로소 내려가는 계단에 발걸음을 내디딘다.

많은 인파가 몰리는 계단은 항상 층계에서 누군가와 어깨를 스쳐야 하고, 굳이 둘이서 나란히 계단을 오르내리며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너무도 즐겁기 때문에 자신들의 발걸음이 느리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이들의 뒤에서 그들이 정한 속도대로 답답한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어쩌면 발걸음이 느리다는 사실보다는 그들이 본인들이 하고 있는 행동이 누군가에게 불편함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거나,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 같다는 나의 판단이 나를 더욱 화내게 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나라면 일단 한 줄로 빠르게 내려간 다음에 넓은 공간에서 이야기를 다시금 이어갈 텐데.'라는 나름의 합리적인 생각과는 달리 내 앞에 펼쳐진 상황은 정반대일 때, 나는 작지만 분명하게 분노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들을 향한 새침한 분노는 뒤이어 자괴감으로 이어지곤 한다. 쪼잔한 분노가 한 번 몰아치고 나면 금세 머리가 차가워져 '그들이 범법행위를 저지른 것도 아닌데, 내가 그런 사소한 행위에 그렇게 크게 반응할 필요가 있었나?'라는 자문을 하게 된다.

그 답은 항상 "아니오"로 귀결된다. 그리고 그 합리적인 답과는 달리 내가 품었던 마음가짐은 짐짓 감정적이었고, 올바르지도 않았다는 사실에 자괴감이 드는 것이다. 그 자괴감이 마음에 불을 지피기 전에 서둘러 마법의 문구 '그럴 수 있지'를 되뇌며 그들의 행동도, 그리고 그런 그들을 보며 내린 나의 판단을 대충 합리화해버린다.

사실 따지고 보면 분노도 자괴감도 그리 크지 않고, 분노에서 자괴감으로 전환되는 과정도, 자괴감이 진화되는 과정도 순식간에 이루어진다. 그 과정 중에 내가 직접적으로 표출한 감정도 사실상 없다. 하지만 내 감정이 손쉽게 분노에서 자괴감으로 바뀌고, 그 자괴감을 없애기 위해 서둘러 상황과 감정을 합리화해버리는 스스로에 실망하곤 한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내 감정을 건드렸던 나름의 이유 있는 분노, 자괴감, 간사함, 실망감은 바로 그 나름의 이유들 때문에 더욱 무겁게 느껴지곤 한다. 이런 편집증적인 기질 때문에 타인과의 접점이 잦을수록, 앞서 언급했던 부정적인 감정은 더욱 자주 마음에 들어갔다 나갔다 하며 나를 흔들어놓는다.

내겐 그 감정들이 임계점을 넘어버렸을 때, (그가 어떤 특정한 부정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킨 원인을 제공했다 하더라도) 그 감정을 다른 이들에게 쏟아낼 충분한 이유를 찾아낼 통찰력과 실제로 그들에게 그 감정을 쏟아낼 용기가 없다. 임계점을 넘었을 때 나의 직관은 항상 '민감한 내가 그렇게 받아들인 것이 문제다' 혹은 '내가 그 독 같은 감정의 고리를 빨리 끊어내지 못한 탓이다.'라며 그 부정적인 감정들에 '합리성'을 덧붙여 나를 더욱 짓누른다.

그렇기에 의도적으로 남들과의 접점, 특히 그 접점이 부정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상황은 되도록이면 피한다. 좁고, 많은 인파가 몰리고, 이동방향이 서로 다른 이들이 엉키고, 내가 타인을 판단할 최소한의 공간이 마련된 곳. 교내에서 그 모든 조건이 충족되는 곳은 학교 계단뿐이다.

그렇게 인적이 드문 계단을 한 칸씩 내려가면 가끔씩은 안도감이 들기도 한다. '오늘은 그런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쓸릴 위험을 잘 피했구나'라는 안도감이. '그 사실이 썩 유쾌하진 않지만, 그래도 유쾌하지 않은 선에서 끝나는 것이 분노, 자괴감, 실망감 등을 내게 쏟아내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그렇지. 최악은 면했지.' 그렇게 생각하며 계단을 내려가다보면 이내 우울한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근데 내 최악은 왜 이리도 최악인 걸까.'

오늘도 그런 날들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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