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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지기 Jan 30. 2022

추사 김정희(유홍준 교수)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 추사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고 추사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도 또한 없다. 추사 김정희, 이름 하나만으로도 서예와 학문에서 덮을 자가 없음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심지어 신라의 김생 이래 추사만 한 업적을 남긴 이가 없다고 할 정도이니 그의 업적이 미치는 영향은 우리가 상상하는 그런 수준이 아님은 분명하다.

추사 김정희(1786 ∼1856)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실학자이고 서화가이다. 경주 김씨로 당대 최고 귀족 집안(영조 부마)에서 태어났다. 당시 추사의 집안은 한양에서 살았는데, 그의 모친 유 씨(兪氏)가 전염병을 피해 이곳 예산으로 내려와 출산하였다고 한다.


추사는 세 살 때 붓을 잡고 글씨 쓰는 흉내를 냈다. 추사는 1819년(순조 19) 34살에 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에 임명되고, 예조 참의·병조 참판과 성균관 대사성을 역임하였다. 이때 추사는 청나라의 명사들과 교류를 활발히 하였고, 그들과 신학문도 토론하였는데, 옹방강은 그를 '해동 제일의 문장'이라 칭찬하였다. 아울러 완당阮堂이라는 호를 지어 주었다.


그러나 부친 김노경이 비인 현감으로 있으면서 안동 김씨 김우영을 파직시킨 일로 탄핵을 받아 고금도古今島로 귀양 갔으나 순조의 특별 배려로 풀려난 일도 있었다. 그러나 풍양 조 씨가 정권을 잡자 추사는 병조참판에까지 오르고, 1834년 헌종이 즉위하여 다시 안동 김 씨가 권력을 잡자 추사는 1840년부터 1848년까지 8년간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영의정이며 친구인 조인영의 도움으로 죽음을 모면한 추사는 궁핍하고 외로운 제주도 생활을 통하여 권력의 무상함을 느꼈고, 오로지 학문과 예술에 혼신을 기울여 독자적인 경지를 이루었다. 헌종 말년 귀양에서 풀려난 추사는 1851년 다시 친구 권돈인(權敦仁)의 일에 연루되어 66세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를 갔다가 2년 만에 풀려났다. 그러나 안동 김 씨의 득세로 다시는 벼슬을 하지 못하고, 부친의 묘가 있는 과천의 한 절에 은둔하며 학예와 선리에 몰두하다 71세로 세상을 떠났다. 추사는 쇠락한 귀족의 비애 속에 불교의 비움을 성찰하며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 책을 펴낸 작가는 그 유명한 3구라(김구라, 황석영)로 불러지는 유홍준 교수다. 그만큼 풍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쏟아내는 강의로 모든 이들을 사로잡는다. 유홍준 교수는 미술사학자, 교수, 미술 평론가이다. 198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 평론 부문에 당선된 후 미술 평론가로 활동하였고 명지대학교 교수, 문화재청장 등을 역임하였다.


◇ 책의 서장은 간결하게 쓰여 있다.


“추사를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아는 사람도 없다”라고 했다. 추사체라는 개성적인 글씨를 이야기하면서 책은 시작된다. 그러면서 추사와 동시대 문인인 유 최진은 추사체에 대해 말하고 있다. 추사의 글씨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자들은 괴기 한 글씨라고 할 것이요, 알긴 알아도 대충 아는 자들은 황홀하여 그 실마리를 종잡을 수 없을 것이다.원래 글씨의 묘를 참으로 깨달은 서예가란 법도를 떠나지 않으면서 또한 법도에 구속받지 않는 법이다. - 본문 중에서 (10p∼11p)


◇ 제2장 감격의 연경 60일(24세∼25세/1809 ∼10)

추사가 연경에 가서 벌인 활동과 귀국 후 연경의 학예인 들과 끊임없이 교유하면서 펴 나간 학예 활동은 우리나라 지성사에서 가장 찬란한 국제 활동이었다. 통일신라의 원측· 혜초· 최치원· 김교각과 고려 이제현, 나아가서 20세기의 윤이상·백남준 같은 이가 국제적 명성을 획득한 것보다 더 크고 지속적인 활동으로, 가히 영광이자 자랑으로 삼을 만하다. 라며 이런 국제적 영광의 인물이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추사의 학문과 예술이 바로 그런 국제적 교류 속에서 성숙되고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 후지쓰카의 추사 글씨 수집

후지쓰카는 「논어총설」등의 저서를 남긴 일본의 대표적인 동양 철학자로, 특히 청나라 경학과 고증학에 정통했다. 그런 그가 1921년 북경에 건너가 2년간 머물면서 유리창 서점가에 살다시피 하며 자료를 수집했다. 그 양이 수만 권이나 되었다고 한다. 후지쓰카가 인사동 서점가를 무시로 드나들면서 모은 책이 1,000권, 서간과 탁본이 1,000점에 달했다고 한다. 그 속에 저 유명한 추사의 세한도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 청조 고증학 연구의 제 일인자, 추사 김정희(44p)

후지쓰카는 1936년에 조선조에서 ‘청조 문화의 이입과 김완당’이라는 논문으로 동경제국 대학 박사학위 청구 논문을 제출했다. 그는 청나라 경학을 연구하였으나 결국은 청나라 학술 정수를 환히 꿰뚫은 추사 연구에 일생을 바친 셈이 되었다. “후지쓰카는 청조 경학의 연구자였지, 결코 추사 김정희라는 조선 학자의 연구자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라며 투덜거리기도 했다. 라며 그러나 후지쓰카는 평생을 바친 청조 학술 연구의 결과로 내린 결론은 아주 단호한 것이었다. “청조학 연구의 제 일인자는 추사 김정희다.”


▶ 옹방강이 추사의 박학에 놀란 것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72p)

추사는 옹방강을 찾았다. 옹방강은 늙음을 잊고 추사는 젊음을 잊은 채 마음과 마음이 통했으니, 후지쓰카는 이 만남이야말로 한중 문화 교류사에서 특별히 기록할 만한 일이라고 했다. 이때 추사는 옹방강의 서고인 석묵서루를 두로 보게 된다.


◇ 제4장 출세와 가화(34세∼45세 /1819∼30)- 146p

추사의 증조부 김한신은 영조의 부마이다. 추사는 1819년 4월 25일 34세에 과거시험 대과에 당당히 합격했다. 추사의 대과 급제는 개인의 영광이자 가문의 영예이기도 했다. 순조는 왕실의 친척이 과거에 급제했음을 축하하여 음악을 내려주고 승지를 보내 월성위 묘에 제사케 했다. 과거 급제 후 추사의 관직 이동을 일별 해보면, 38세에 규장각 대교로 출발, 41세에 충청우도 암행어사로 내려가 금의환향했다. 이때 추사는 비인 현감 김우명의 비리를 보고하여 그를 봉고파직하는 조치를 내리게 하였는데, 김우명은 이에 원한을 품고 이후 추사와 부친 김노경이 당하는 두 차례의 가화 때 공격에 앞장서는 저승사자가 된다. 추사는 42세 때 의정부 검상을 거쳐 예조 참의, 44세 때는 규장각의 검 교대교 겸 세자를 가르치는 시강원의 보덕이 되었다.


▶ 눌인 조광진과의 만남(166p)


추사가 평양에서 만난 또 한 사람은 눌인 조광진(1772∼1840)이다. 눌인은 평양 사람으로 부벽부와 연광정 등의 현판을 쓴 당대 명필이었다. 본래 말 더듬이었기 때문에 어눌할 눌(訥) 자를 써서 호를 눌인이라 했다. 처음에는 원교 이광사의 글씨를 본받아 배웠고 나중에는 필획에 뼛골이 강한 안진 경체에 심취했다가 추사를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독창적인 서풍을 갖게 되었다. 당시 그의 글씨 획은 마치 “쇠를 구부리고 철을 녹인 듯”하여 세간의 글씨 같지 않다는 평을 받았다. 추사는 눌인의 글을 청아하고 기발함이 압록강 동쪽에서는 일찍이 보지 못한 봐라고 상찬 할 정도였다.


◈ 숲지기 이갸기


조선 후기 명필이 많다. 그중에서도 1700년 후반기에 명성을 날린 서예가가 많다.

한양에는 추사 김정희(1786-1856), 평양에는 눌인 조광진(1772∼1840), 전주에는 창암 이삼만(1770∼1847), 남도(신지도, 귀양지)에는 원교 이광사(1705-1777)가 있다. 이분들 중 추사는 제주 유배 길에서 창암을 만났다. 그리고 창암의 글을 보고 한참을 말이 없다가 입을 열었다. “노인장께서는 시골에서 글씨로 밥은 먹겠습니다.”라고 독설을 했으며(책 241p), 원교에게는 귀양 가면서 대흥사 현판이 원교 글씨(동국진체) 임을 보고 조선의 글씨를 다 망처 놓은 사람의 글을 걸었다며 초의 선사에게 원교의 현판을 떼어 내리고 내 글씨를 걸라고 했다.(책 242p) 당신이 써준 글을 현판에 걸었다가 제주 유배를 마치고 들려 다시 원교 글로 걸라고 했다. 지금 대흥사 대웅전 현판이 그 글씨이다. 또한 지리산 천은사 일주문, 강진 백련사 대웅보전, 만경루 현판도 원교 글씨이다. 창암 글씨는 지리산 천은사 보제루 현판이 있다. 이 글씨는 창암이 죽기 3년 전에 쓴 글씨이다. 


◇ 제6장 세한도를 그리며(55세 ∼59세/ 1840∼1844) -237p


▶ 위리안치라는 형벌(238p)

추사에게 내려진 벌은 정확하게 말해서 ‘대정현에 위리안치하라’였다. 추사는 그 많은 유배지 중에서 가장 멀고 살기 힘든 원 악지인 제주도, 거기서도 서남쪽으로 80리 더 내려가야 하는 대정현에 위리안치되었으니 곱절로 가혹한 징역이었던 셈이다. 추사는 그곳에서 자아를 재 발견했다. 유배지로 가는 길은 전주· 해남을 거쳐 완도에서 배를 타고 제주 화북진 항구에 들어가 여기서 다시 80리 떨어진 대정현까지 가는 긴 행로였다. 이때 추사는 심정을 벗 권돈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행실 치고 조상에게 욕이 미치게 하는 것보다 더 추한 것이 없고, 그다음은 몸에 형틀이 채워지고 매를 맞아서 곤욕을 받는 것인데, 나는 이 두 가지를 다 겸했습니다. 40일 동안에 이와 같은 참혹한 독을 만났으니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 백파 스님과의 논쟁(278p)
            

추사는 당대 대선사인 백파(1767∼1852) 스님과 왕복 서한으로 일대 논쟁을 벌인다. 백파는 선을 의리선 義理禪· 여래선·조사선으로 구분하고는 조사선을 우위에 놓으면서 마음의 맑음은 불佛의 대기大機이고 마음의 밝음은 법의 대용大用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맑음과 밝음이 어우러지는 조사선의 대기 대용大機大用이大機大用 베풀어지면 세상의 실상과 허상, 드러남과 감추어짐이 함께 작용하는 살활 자재殺活自在의殺活自在 경지에 이르게 된다고 주장했다.


이에 초의가 이를 반박하고 나섰다. 초의는 교敎와 선禪은 다른 것이 아니며 조사선이 여래 선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입각처가 선이면 조사선이고, 교이면 여래선이 된다면서 ‘깨달으면 교가 선이 되고 미혹하면 선이 교가 된다’는 유명한 명제를 내세웠다. 이 논쟁의 와중에 해동의 유마거사라고 불리는


추사가 끼어들어 백파와 불꽃 튀는 논쟁을 벌이게 된 것이다. 당시 백파는 화엄종의 종장으로 77세, 추사는 58세였다. 이 논쟁에서 추사가 백파의 오류를 지적한 것이 그 유명한 백파 망증 15조다. 추사는 백파망증 15에서 대단히 공격적인 말투로 감정이 격하여 지나친 극언을 보이기도 한다.


◈ 숲지기 이야기


 추사는 이때까지만 해도 제주도 유배에서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분노가 가득했던 모양이다. 추사는 영조 부마의 후손이다. 대단한 신분임에도 대정현 위리안치의 처참함을 분노로 풀어내지 않았을까. 추사는 유배지에서 해배되어 한양으로 오르면서 대흥사에서 당시의 오만했던 자신을 반성하고 원교의 글을 다시 걸었다. 추사가 쓴 무량수각을 떼어내고 원교 글씨 현판을 교체하려는 순간, 추사는 초의 선사에게 말한다. ‘신구 가 후세 사람들에게 비교되는 것도 무던하지 않겠냐’며 내 것도 하나쯤 남겨 놓았으면 한다. 고 하자 무량수각은 떼지 않고 지금까지 걸려있다.

추사는 한양으로 올라가면서 백파 선사와 만나기로 했으나 끝내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백파는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추사가 타게 1년 전에 백파 선사 율사비를 썼다. 이 비문은 고창 선운사 부도전에 있다. 글씨는 추사체로서 절정이다. 앞면에는 방정하게 해서체로, 뒷면에는 변화무쌍하고 자유분방한 행서로 쓰여있다. 뒷면 비문 마지막 줄과 완당 학사 및 건립 일자 등이 추사 글이 아님을 유홍준 교수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정확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원래 비는 훼손을 우려하여 선운사 성보박물관에 보관 중이고 지금은 모본이 부도전에 있다. 창암에게도 화해를 하러 갔으나 이미 타계하였다. 이에 추사는 비문을 써서 화해를 하고 자신의 오만했던 과거를 반성했다.

▶ 세한도(286p)


추사 나이 59세 되던 해 1844년 유배 온 지 5년이 되었을 때, 추사는 최고의 명작으로 손꼽히는 세한도를 제자인 우선 이상적에게 그려준다. 이상적은 스승인 추사가 귀양살이하는 동안 정성을 다해 연경에서 구해온 책을 보내드렸다. 이에 추사가 그 고마운 마음의 표시로 그린 것이 세한도다. 세한도는 누구든 추사 예술의 최고 명작이자 우리나라 문인화의 최고봉으로 손꼽히는 데 주저함이 없다.


세한도의 변천 과정은 이상적 사후 그의 제자였던 매은 김병선에게 넘어가 그의 아들 소매 김준학이 이 시를 읽으며 공부했던 감사함을 두루마리 끝에 적어 놓았다. 그 뒤 세한도는 휘문고등학교 설립자 민영휘 소유가 되었다가 그의 아들 민규식이 매물로 내놓아 추사 연구가인 후지쓰카의 손에 들어갔다.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 여름, 서예가이자 수집가로 추사 작품의 최고 컬렉터였던 소전 손재형은 전쟁 중에 후지쓰카가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세한도를 가지고 갈까 걱정하여 후지쓰카를 방문하여 원하는 대로 다 해드리겠으니 세한도를 양도해 주십사 하고 부탁했다. 그러나 후지쓰카는 자신도 추사를 존경하므로 이를 고이 간직하겠노라고 거절했다.


후지쓰카가 경성제대를 정년하고 일본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안 소전은 그 후 비장한 각오로 일본으로 건너가 후지쓰카를 찾아갔다. 막무가내로 넘겨 달라고 졸랐다. 후지쓰카는 단호히 거절했다. 그러나 소전은 매일 찾아가 졸랐다. 그러다가 12월 어느 날 후지쓰카는 마침내 소전의 열정에 굴복하여 맏아들 아키나오에 게 내가 죽으면 소전에게 넘겨주라고 당부했으니 안심하고 본국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그러나 소전은 만족하지 않았다. 바로 양도해 준다는 말만 기다리며 묵묵히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자 후지쓰카는 세한도를 간직할 자격이 있는 이는 바로 소전이라며 선비가 아끼던 것을 값으로 따질 수 없으니 어떤 보상도 받지 않겠다며 잘 보존만 해달라고 했다. 그리하여 소전은 마침내 세한도를 가지고 서울로 왔다. 그러나 소전은 국회의원 선거 출마로 선거 자금에 쪼들리면서 세한도는 사채업자에게 저당 잡히고 말았다. 소전은 끝내 돈을 갚지 못해 소유권을 잃었다. 그 후 미술품 수장가인 손 세기에게 넘어갔고 지금은 그의 아들인 손창근 씨가 소장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기탁되어 있다가 최근에 소장자께서 국가에 기증되었다.- 286p∼297p

                          

◇ 제8장 강상의 칠십이고 초당에서(64세∼66세/ 1849∼1851) - 364p


▶흔허 스님과 은해사 현판

어느 날 흔허 스님이 추사를 찾아왔다. 흔허는 시승 이었다. 「완당서생전집」에 「흔허에게 주다」라는 시가 3수나 실려 있을 정도로 둘은 가까운 사이였다. 흔허는 영천 은해사의 현판 글씨를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이에 추사는 일주문의 은해사, 본당의 대웅전, 종각의 보화루, 불광각 불광 등을 써주었다. 지금 통도사에 있는 일로향 각도 원래 은해사에 있던 것이라고 한다. 은해사는 추사 글씨의 전시장이다.


◇ 종장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 (561p)


1856년 10월 10일 추사가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추사의 묘는 예산 추사고택 옆에 모시고 두 부인과 함께 합장했다. 제자들은 앞다투어 선생의 영전에 통곡했다. 그중에서 추사의 평생지기 권돈인은 추사 사후 뒷일을 모두 감당해 주었다. 추사가 떠나고 6개월이 지난 1857년 4월 3일 마침내 아버지 김노경과 함께 억울한 누명을 벗고 복권된다. 친구 권돈인은 추사의 제자 희원 이한철에게 흑단령을 입은 추사의 초상을 그리게 했다. -초상화는 본문 565p


1857년 초여름 권돈인은 추사의 영정을 예산 향 저에 봉안하고 추사 영실이라는 현판을 새겨 결어 놓고 쓸쓸히 집으로 돌아가는데 죽은 옛 친구를 생각하는 감회를 이기지 못하여 「그대의 모습을 그려보려고 했으나 그리기가 어려워 시로 읊는다」라는 애절한 시를 써서 그의 아들 상주에게 주었다. 그러나 추사가 그렇게 보고 싶어 했던 벗 초의는 장례에 참석하지 않았다. 당시 스님은 도성 안이나 사람이 많이 모이는 속세에는 몸을 잘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추사 사후 2년이 되는 1858년 대상을 앞두고 홀로 찾아와 통곡의 제문을 바친다.



◈ 힐링의 숲지기 생각

유홍준 교수가 쓴《 추사 김정희》 책을 포스팅합니다. 이 책은 숲 지기가 총 3번을 읽었던 책입니다. 그래서 포스팅하고자 할 때 어느 구절을 생략해야 할지를 고민했습니다. 소중하지 않은 문장이 없었습니다(총 598페이지). 이 책은 추사의 일생을 정리해서 읽어야 합니다. 포스팅이 장문이 되었습니다. 그만큼 간략하게 줄이지 못하는 책입니다.

추사체의 지향점은 불이선의不二禪蘭 불계공졸不計工拙이라 할 수 있습니다. 평생을 두고 열 벼루와 일만 개 붓을 없앤 추사의 노력이 무엇을 지향했을까. 추사는 “실사구시설”을 통해 학문하는 방도에는 굳이 한(漢) ㆍ 송(宋)의 한계를 따질 필요가 없으며 오로지 사실에 의거하여 진리를 찾는다는 자세로 나아감이 옳다며 고증학의 타당성을 뒷받침했다고 추사 박물관 학예사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추사는 위대한 서화가입니다. 그리고 불교학자이며 역사학자입니다. 또한 고고학자입니다. 이 책 《추사 김정희》는 탄생부터 만년까지, 파란 많은 일대기를 중심으로 추사의 학문과 예술을 알기 쉽게 풀어놓은 역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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