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숲지기 Apr 01. 2022

겨울 주름을 펴는 삼월 숲

산자고가 길을 밝혔다.

봄을 기다리지 않는 사람에게는 한낮 야생화에 지나지 않겠지만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갓 피어난 생명을 마주하며 “벌써 피었구나.”라는 말을 건네는 기쁨을 만끽하게 된다. 그것은 우주 한 매듭과 부딪치는 형언할 수 없는 순간이다. 며칠 전, 언 땅에 봄비가 대지를 적시는 동안 천지는 숨을 죽이고 생명이 돋아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모진 자리에 돋아나 야무지게 봄을 붙들었다. 오늘은 수선화도 피었고, 목련도 터졌다. 개 복숭아 나뭇가지에 붉은 응어리가 매달렸고, 어느 종가댁 장독대를 기댄 해당화도 꿈틀거리고 있다.


백수인 시인은 ‘봄은 얼음장 밑에 작은 목소리로 흐르고 있었고, 따사로운 햇볕 조각들이 때 이른 봄노래를 부르고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오늘은 물의 하얀 근육과 뼈다귀가 한세월 건너며 흐늘흐늘 부르는 만가輓歌를 들었다’고 봄이 오는 소리를 노래했다. 그렇다. 삼월 봄 숲에서는 오래전부터 겨울 주름이 펴지는 만가가 들려왔고 그리운 사람이 불쑥 빗장을 열고 나오기도 했다.

삼월 봄에는 사람만 그리운 건 아니다. 산비탈을 가르며 흐르는 도랑물도 그립고, 어느 산중 암자 양철 지붕에 떨어지는 밤비 소리도 그립고, 너럭바위 옆에 알싸한 향기를 품고 서 있는 생강나무도 그립고, 뒷마당 돌담을 기댄 산당화도 그립고, 보리밭 이랑을 넘어오는 갯바람 냄새도 그립다. 삼월이면 한 철 꽃이 피고 한 철 그리움도 피어난다. 잎샘이 지난밤, 속절없이 동백꽃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누군가를 기다리던 풋풋한 밤도 그립다.


그리움이 눈부신 삼월이면 숲 밖으로 새소리가 조잘조잘 흘러나오고, 하릴없이 무거워지는 숲을 바라보는 날이 많아지고, 겨울을 벗기 위해 어김없이 비가 내리고, 어린 나뭇잎이 새 숲을 만들기 시작한다. 비 냄새가 가시지 않는 자리에서 나무와 새싹의 조화로움을 느낀다. 나뭇잎은 나무의 꽃이다. 나뭇잎은 나무를 지키고 키우지만, 누구에게도 사랑의 눈치를 받지 않으면서도 삶은 푸르다. 나무가 숲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나뭇잎이 숲을 이루는 것이다. 우리는 나뭇잎 같은 사람과 자주 마주한다. 화려하지 않으면서 어디선가 본 듯한 곱살스러운 사람, 꼭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넉넉한 사람, 욕심 없이 주어진 데로 익어가는 사람, 어려운 길도 내 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서는 사람 냄새가 나고 따사로운 눈빛을 가졌다. 나는 오늘 나뭇잎 같은 사람을 알지 못하고 지나치는 어리석음에 하루가 고약할 뿐이다.

침묵과 고귀한 단순만이 존재되는 숲은 우리를 안아주고 위로를 건넨다. 숲에서는 자신을 낮출 줄 알기에 청순한 야생화가 피고, 향기로움이 머무는 것이다. 오늘 숲에서 조용한 야생화와 마주한다. 땅을 보듬고 살아도, 심술궂은 꽃샘추위에 온몸이 흔들려도 꺾이지 않는다. 비록 흔들릴지라도 기어이 꽃을 피운다. 그래서 야생화는 우리의 삶처럼 모진 고통을 이겨내기에 더 애잔하다. 뉘 집 정원 기름진 땅에 피어 사랑받는 꽃이라면 왠지 살찐 꽃, 아름답기만 한 꽃, 교만해진 꽃일 것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선입관이 불쑥 든다. 그래서일까 풀밭에서 온밤 열병을 앓다가 몸을 푼 야생화를 만났을 때 터지는 탄성은 내 안에 봄이 터지는 소리이고, 그리운 사람을 끄집어내는 간절한 소리이고, 위대한 고요와 하나 되는 순간이다.


봄은 기다림의 계절이다. 그래서 ‘꽃씨 속에 숨어있는 꽃을 보려면 고요히 눈이 녹기를 기다리’고 ‘꽃씨 속에 숨어있는 잎을 보려면 흙의 가슴이 따뜻해지기를 기다리라’고 한 시인처럼 기다림에 익숙해야 봄을 맞이할 수 있다. 발끝에 힘을 주고 헐거워진 고요 속으로 들어가 홍매화와 마주한다. 내일 필 꽃보다 오늘 조금 부족하게 피어있는 꽃이 더 소중하다. 꽃샘바람에 흔들리는 붉은 꽃을 보라. 그냥 흔들리지 않는다. 겨우내 품어왔던 맑은 향기로 종족 보존의 생명을 유혹하지 않는가. 상처를 붙들고 한 잎 한 잎 꽃잎을 떨구고 있는 모습이 얼마나 당당하고 위대한가. 상처 입은 삼월 꽃에서 이제야 삶의 향기를 본다.


봄에 피는 야생화는 지켜보아야 알 수 있다. 피었다가 지는 그날까지 감동을 준다. 쉽게 눈에 띄지 않지만 순수함을 잃지 않고 피었다가 시든다. 화려함을 자랑하지 않고 알아주지 않는다고 원망하거나 독을 품지 않는다. 그냥 묵묵히 피었다가 지는 것이 야생화다.


그러기에 지금 걷는 걸음은 사소하게 걷는 걸음이 아니다. 초조함을 버리고 야생화를 만나러 가는 순진한 마음으로 느릿느릿 걸어야 한다. 그래야 숲과 꽃들이 두런거리는 소리를 가슴으로 들을 수 있다.

봄을 홀리는 계곡 물소리가 가득하다. 봄꽃들에 너를 내보이라고 재촉하는 소리다. 꽃은 시간이 없어 피지 않는다. 조금 늦게 피었다고 꽃 아닌 적 없다. 꽃은 피어야 할 때를 알고 피고 꼭 있어야 할 곳에 피어 세상을 밝힌다. 산자고가 피었다가 지면 그 언저리 어딘가에 구슬붕이 꽃이 무리 지어 피어날 것이다.


내일부터는 산자고 지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대지를 흔들고 피던 산자고가 시들 듯이 내게도 언제부턴가 기다려온 것들이 하나둘씩 무심히 지나가곤 한다. 깊이 들여다보지 않으면 섞여 들어온 계절의 숨소리조차도 놓치곤 하는 삼월이 지나가는 날, 길섶 바위에 걸터앉아 숨을 다독이는 숨 자리에서 불쑥 삶의 파편들이 심장을 휘젓고 지나간다. 묵혔던 상처와 결핍이 멈칫거리기도 하고, 오래된 상처도 튀어나온다. 실핏줄처럼 엉킨 어제의 일들이 싱싱하게 분출하기도 한다. 이제 얼룩진 상처는 더는 기억으로 튀어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지 않고서는 오늘 숲이 주는 은혜로운 고요와 침묵을 품을 수가 없을 것 같다.












작가의 이전글 집착으로부터 한 발 멀어져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