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일일영감의 잡담, 영화 <녹색광선>
지난 주 일일영감의 잡담에서 소개해드렸던 스탠리 큐브릭의 <롤리타>에 이어, 오늘은 1980년대 뛰어난 '문학적 영상미'로 침체되었던 프랑스 영화를 부흥시키는 계기된 작품 <녹색광선>을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새로운 물결(New Wave)’라는 뜻을 지닌 프랑스의 영화 운동 누벨바그의 일원이었던 에릭 로메르의 연출작입니다. 특유의 감성과 매력을 지닌 프랑스 영화에 관심 있는 분에게 추천드립니다.
청승맞게 혼자 여행하기
<녹색 광선>에서 델핀느가 친구들을 따라 셰르부르에 여행 왔다가 이탈해 혼자 숲 속으로 들어가는 장면. 양옆으로 초록색 잎이 무성한 나무들이 터널을 만들고 있다. 이 터널 같은 암녹색 공간으로 이끌리듯 걸어가는 델핀느의 뒷모습. 그동안 내내, 그다지 유별날 것도 없어 보이는 델핀느는 왠지 모르게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한다. 여행을 같이 떠날 파트너도 구하지 못한 채 그녀는 청승맞게 혼자 걷고, 혼자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또 혼자 운다. 그녀는 무언가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혼자인 상태를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이 오히려 혼자 여행한다. 혼자 여행하기는 델핀느의 경우처럼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이고 그 대상은 미지의 이성이다. 혼자 여행하는 사람은 매 순간 짝을 찾고 있는지 모른다. 다시 다른 말로 해보자. 혼자 여행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더 나은 날에 대한 그림이 없는 사람들이 혼자 여행할 수 없다. 아무런 확신 없이 뭔가 얻을 것이 있으리라는 막연한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사람들은 혼자 여행하지 않는다. 혼자 여행하는 사람들은 저마다 마음속에 새로운 사람, 사건, 장소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열차에 오른다.
영화 속 바닷가 한 할아버지에 따르면 녹색 광선이란 해가 지평선 아래로 넘어가기 바로 직전 빛의 굴절에 의해 태양의 윗부분이 몇 초간 녹색으로 보이는 현상을 말한다. 매번 볼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날씨가 흐리거나 구름이 낀 날에는 더욱 보기 힘들다. 그래도 어쨌거나 일몰을 볼 수 있는 장소에서 여러 차례 기다리면 영영 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몇 차례의 여행 끝에 델핀느는 결국 기다리던 결말을 맞았을까? 나는 이 질문에 부정적으로 대답하고 싶지 않다. 에릭 로메르는 당신이 별나거나 이상한 것이 아니고 그냥 지금의 상태가 그럴 뿐이니까, 그저 기다리라고 안심시킨다. 무언가 기다리고 있다면 나는 당신에게 <녹색 광선>을 추천하고 싶다.
글_정태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