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선택의 결과였지만 아무튼 평생을 이방인으로 살아온 나였기에 나는 특정한 장소가 아닌 특정한 사람들을 “집”이자 안식처로 인식하고 사람을 중심으로 장소나 기억들을 엮어 나간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특별하게 여기는 장소가 없는 건 아니다. 다만 나에게 “집”이나 특별한 장소는 대체로 사람이나 사람을 중심으로 한 기억을 의미할 뿐이다.
한 예로 내 본가가 있는 강릉은 나에게 강릉 자체가 주는 의미보다는 "엄마아빠"라는 의미가 크다. 다르게 말하면, 나에게 “집”은 강릉이 아니라 그게 어디가 되었든 엄마아빠가 계신 장소이다. 강릉에 큰 추억이 있다기보다는 엄마아빠와 함께한 기억이 있는 거니까.
나에게 고등학교의 추억은 뉴질랜드 오클랜드라기보다는 가장 친했던 친구들인 클로이, 첼시 그리고 상헌이고, 대학의 추억은 가장 친했던 친구들인 코토, 초이, 폴, 그리고 준영이다. 사람들에게 내 기억들을 엮어놓는다. 강릉도, 오클랜드도, 도쿄도 나에게는 큰 의미를 가지는 장소지만 다른 장소에, 다른 시간에 위의 사람들과 함께 있다면 나는 다시 그때 그곳으로 나를 돌려놓을 수 있다.
스물 세 살인 지금도 클로이와 만나거나 전화할 때면 내 말투와 행동은 다시 열일곱이 된다. 상헌이나 첼시를 만나도 마찬가지다. 술을 먹고 클럽을 가는 등 그때는 못 했던 것들을 할 순 있지만, 그 친구들을 만나면 나는 다시 고등학생이 된다.
어느 일요일 저녁, 압구정에서 대학교 때 친구들과 선배들을 만났다. 다들 일본에서 대학을 나왔지만 한 명은 미국인으로 미국 내에서 여러 주를 옮기 다니다가 대학을 일본으로 왔고, 한 명은 미국 국적인데 한국과 뉴질랜드에서 자랐고, 한 명은 필리핀 사람인데 학창 시절을 베트남에서 보냈고, 나머지 셋은 한국 국적이지만 각자 한국과 뉴질랜드, 미국과 캐나다, 그리고 한국과 일본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미국에서 자란 친구 빼고는 그 누구도 특정한 국가를 집으로 여기지 않았다. 나는 한국이 내 집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으나 한국에서 산지 1년도 안 되어 그 생각이 깨졌다. 한국은 나에게 집이 되어주지 못했다. 미국에서 자란 친구도 특정한 장소가 "집"인건 아니었다. 어차피 부모님이 사는 곳에 가 봤자 함께 자라온 친구가 있는 것도, 많은 추억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냥 부모님과 밥을 먹고 시간을 보내는 게 전부라고 했다. 살아온 다른 모든 장소와 마찬가지로 언젠가 돌아갈 수도 있는, 잠깐 살았던 도시 정도의 의미를 가진다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공감했다.
이제 도쿄에 가봤자 내가 도쿄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하던 사람들은 대부분 없다. 뉴질랜드에 가봤자 내가 뉴질랜드에서 가장 많은 기억을 만든 사람들은 거기에 없다. 제주도, 강릉도 마찬가지다. 오클랜드에서 학교를 다닐 때 나에게 집은 내 룸메이트였던 첼시였고, 대학 시절 나에게 집은 친구들이었고, 도쿄에서의 마지막 6개월 동안 나에게 집은 잠깐 같이 살던 남동생이었고, 전 남자친구를 만나던 시절에 나에게 서울에서 집은 그였다. 나에게 “집”은 항상 사람이었다. 살고 있는 기숙사 방에, 아파트에 물리적으로 들어갔을 때 마음이 편해진다기보다는 내가 집으로 여기는 사람들의 곁에 있을 때 나는 편안함을 느꼈다.
압구정에 모인 우리는 이런 얘기에 전부 공감할 수 있는 방랑자들이었다. 우리 모두에게 "집"은 항상 사람이었다. 살면서 처음 가 보는 곳이라도 가장 친한 친구들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면 그곳에서 우리는 편안했고, 안정감을 느꼈고, 그곳이 곧 집이 될 수 있었다. 한 장소에서, 한 국가에서, 몇 년 이상 터전을 내리고 사는 자신의 모습이 잘 상상이 안 간다고 했다. 실제로 나와 한 명의 친구를 제외한 모두는 지금 살고 있는 나라에서 새로운 곳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관계를 쌓으면 그 사람이 당시의 나에게 집이 되어준다. 그 어느 곳도 우리에게 집이 되어주지 못했으나 역설적으로 우리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는 곳이면 그 어느 곳이라도 우리에게 집이 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