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퍼런 봄에 던져진

우리가 길을 헤메이는 시퍼런 봄의 날들은 아직 한가운데

by 하루

나는 내가 시퍼런 봄에 던져진 존재인 것 같다. 우리는 시퍼런 봄에 던져졌다. 지하철에 앉아 집으로 돌아가는 길, 스포티파이로 “시퍼런 봄”을 반복재생해 둔 상태에서 문득 내 스스로가 시퍼런 봄에 던져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시공부를 그만두고 그토록 부족하기만 했던 시간이, 여유가 많이 생겼다. 나는 원래 참 해보고 싶은 게 많은 사람이고 도전하고 싶은 것도 많은 사람인 데다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을 좋아하는지라, 처음 만난 사람들과 밴드를 할 수 있다는 어느 프로젝트의 인스타그램 광고를 본 순간 홀린 듯 신청 폼을 입력했다. 그리고 한 달 후 나는 밴드 노필터의 보컬이 되어있었다.

나는 두어 번 이름만 들어본 정도였던 밴드 쏜애플은 나와 같은 팀이 된 멤버들 모두가 이미 좋아하던 밴드였고, 우리가 만난 첫날 쏜애플의 “시퍼런 봄“은 우리의 공연곡으로 확정된다. 물론 그 미친 고음을 소화해 낼 수 있던 남자 보컬 오빠 덕분이고, 미친 난이도를 소화해 낼 수 있던 세션들 덕분이다. 공연 날, 마지막 순서였던 우리의 마지막 곡이 된 시퍼런 봄은 정말 멋있었고 나는 우리의 시퍼런 봄을 사랑했다.


"시퍼런 봄." 한자로 생각해 보면 청춘. 청춘이다. 온갖 드라마나 영화에서 청춘은 주로 파랗고 아름답게 그려진다. 고난과 역경이 존재하는 청춘들도 미디어에 등장하긴 한다. 하지만 우리가 매체에서 접하게 되는 청춘은 주로 해피엔딩을 맞게 되고 그렇게 우리가 알 수 있는 그들의 이야기는 행복하게 끝맺음되고는 한다.


그러나 사실 청춘은 파랗고 아름답기만 하지는 않다. 서슬 퍼렇게 무섭고, 눈물 나게 힘들고, 쥐어짜듯 우리를 아프게 하기도 한다. 청춘의 한가운데에 있는 우리에게, 아니 적어도 나에게, 미래에 존재할지도 모르는 나의 해피엔딩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끝없는 길이 존재할 뿐이고 그 과정의 무서움과 힘듦, 아픔이 눈앞에 보일 뿐이다.


“아무것도 하기 싫어 / 우리는 그늘을 찾았네

태양에 댄 적도 없이 / 반쯤 타다가 말았네“


곡의 첫 가사부터 아무것도 하기 싫어 그늘을 찾는다 한다. 태양에 댄 적도 없는데 반쯤 타다가 말았단다. 무언가에 노력을 한 번쯤은 해 본 청춘이라면, 그러나 그 무언가에 다다르지 못했던 경험이 있는 청춘이라면 더더욱, “시퍼런 봄”의 첫 가사가 와닿을 거라고 생각한다. 태양에 닿기 위해 노력했으나 닿지 못했을 때 우리는 아무것도 하기 싫어진다. 모든 것에서 달아나 그늘을 찾는다. 우리는 이미 반쯤 타버린 채로 발버둥친다.


“시든 꿈을 뜯어먹지 말아요

머뭇거리지도 말아요

어쨌거나 달아나진 말아요

오늘 하루를 살아남아요“


시든 꿈을 뜯어먹지 말자고 한다. 이미 시들고 빛바랜 꿈을 되돌아보고 굳이 뜯어먹지 말자. 시든 꿈은 수없이 많은 청춘이 경험하는 실패가 아닐까. 우리는 시퍼런 봄, 청춘 한가운데서 실패하고 좌절한다. 미련이 남을 것이고 아쉬움이 남을 것이다. 그렇게 시든 꿈을 뜯어먹게 되는 일도 있다. 되돌아가야 할지, 나아가야 할지, 나아간다면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할 때도 있다. 그러나 머뭇거리며 실패만을 되돌아보고 곱씹기만 해서는 안 된다. 때로는 빠른 포기가 현명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달아나서도 안 된다. 시든 꿈을 발판 삼아 일어나야만 한다. 실패를 뒤로 하고 앞으로 나아간다. 어쨌든 우리는 오늘 하루를 살아남아야 하기에. 시간은 흐르고 우리는 성장하겠지.


“우리는 이 몸에 흐르는

새빨간 피의 온도로만 말하고 싶어

차가운 혀로 날 비웃지는 말아줘

이를 물고 참은 하루와

끊어질 듯 이어지는 길“


청춘은 시퍼렇지만 우리 몸에 흐르는 이 피는 새빨갛다. 우리 모두가 사실은 가지고 있는 새빨간 피의 뜨거운 온도를 생각하게 한다. 우리는 모두 청춘이었고 새빨간 꿈과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혹은 우리는 지금도 새빨간 꿈과 열정을 가진 청춘이다. 이와 대비되는 사람들의 차가운 혀와 식어버린 말들은 우리를 비웃기도, 우리를 아프게 하기도 하겠지만, 우리는 이를 물고 참아낸다. 우리의 뜨거운 피가 식어버리지 않도록 오늘 하루를 견뎌낸다. 그러면 우리가 걷는 이 시퍼런 봄의 길이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다. 우리는 살아남는다.


“우리가 길을 헤메이는

시퍼런 봄의 날들은 아직 한가운데

멈추지 말고

몸부림치며 기어가

쏟아지는 파란 하늘과

아득하게 멀어지는 길“


청춘을 살아남고 있는 우리는 모두가 헤매고 있다. 내가 걸어가는 길의 종착지는 보이지 않고 나는 몸부림치며 기어가고 있으나 나의 길은 아득하게 멀어진다. 멈추지는 않는다. 나는 아등바등 살아내고 있다. 우리는 모두 아등바등 몸부림치며 청춘의 한가운데를 기어가는 중인 거다. 그러다 보면 우리가 가는 길이 아득하게 멀어지기도 한다. 그럴 때면 이렇게 아등바등 살아서 결국 어디로 향하는 건지 모르겠고, 그렇게 길을 헤매게 되며, 그저 지금 이 순간이 마냥 힘들기만 하다. 가끔은 이렇게 아등바등 살아남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파란 하늘은 쏟아진다. 청춘은 계속된다.


작사가가 실제로 의도한 바는 모르겠으나 나는 이 가사를 읽으면 읽을수록, 부르면 부를수록 청춘의 실패와 아픔, 혼란을 노래한 가사라는 생각이 든다. 새빨간 피를 가진 우리가 살아남아야 하는 시퍼런 봄. 길을 잃고 헤맬 때도 멈출 수 없고 넘어져서 아플 때도 몸부림치며 기어가야 하는, 이를 물고 참아내고 살아남아야 하는 하루. 그렇게 반복되는 하루하루를 쌓고 또 쌓아 만들어내는, 끊어질 듯 이어지는 길. 청춘이다. 시퍼런 봄이다.


그렇게 시퍼런 봄에 청춘들은 던져진 존재들이다.


던져졌다는 말은 실존주의 철학자들에게서 따왔다. 나는 철학적 소양이 부족한 사람이기 때문에 감히 실존주의에 관해 논하면 안 될 것 같지만, 인간이 내던져진 존재라는 그들의 문장이 나에게 너무 크게 와닿았다.

인간은 던져진 존재들이라는 전제에서 그들의 철학은 시작한다. 인간은 무의미하고 의지도 없는 던져진 존재이기 때문에 더더욱 주체적으로 삶의 의미를 규정하고 추구하는 것이고, 또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라고 한다. 그 논리전개의 결과 그들이 주장하는 사회문제 참여를 통한 자아실현 등은 차차하고, 나는 자기 의지와 관련 없이 세상에 던져진 인간이라는 그 전제가 참 와닿았다.

여느 철학적 이론과 마찬가지로 실존주의 역시 "나는 무엇인가? 그리고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에 답하려고 한다. 인간은 태어난 이상, 즉 이 세상에 내던져진 이상, 자신의 삶을 자신이 선택하게 된다. 우리는 당연하게도 이 선택에 대한 불안감에 압도되고 괴로워하지만 우리가 가지는 이 자유의지와 그에 따른 선택을 통해 스스로의 미래를 만들어간다. 그렇게 자아를 형성한다.

인간은 주어진 것으로 세상에 존재하지만 개인의 삶은 선택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인간은 선택에 의해 태어나지 못했지만 삶은 선택에 의해 존재한다.


내 선택으로 내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게 된 것이 아니므로 나는 던져진 인간이다. 우리는 모두 던져진 존재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꿈꾸고, 싸우고, 버티고, 견뎌내야만 한다. 내 삶의 의미를 내가 알아서 규정해야 하고, 그 의미를 위해 스스로 살아남아야 한다. 던져진 존재이기 때문에.

특히 청춘을 살아가는 우리는 더더욱 던져진 존재들인 것만 같았다. 혼란과 두려움이 가득한 이 서슬퍼런 계절을 살아나가는 우리는 법적으로, 사회적으로 스스로를 책임져야만 하는 성인이지만 또 아직은 완전한 어른이 되지 못한 사람들이다. 부모님, 선생님과 같은 어른들의 보살핌에서 벗어나 이 세상에 던져진 것이다. 모든 게 처음이라서 우리는 괴로워한다. 많은 것이 새롭고 또 많은 것이 어렵다. 따라서 우리는 때때로 길을 잃고 헤매기도, 머뭇거리기도 하며, 이 계절을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게 된다.

청춘은 누구에게나 주어져 있다. 하지만 결국 청춘이라는 이 계절 속에서 어떠한 삶을 선택해서 살아나갈 것인지는 나에게 달려 있다. 나의 시퍼런 봄은 나의 선택대로 만들어질 것이고, 당신의 시퍼런 봄은 당신의 선택대로 만들어질 것이다.

시퍼런 봄에 던져진 우리는 세상과, 사랑과, 사람과 또 시간과 관계를 만들면서, 길을 헤매고, 몸부림치며 기어가며 살아남고 있다. 우리는 시퍼런 봄에 던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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