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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꾸미 Mar 12. 2022

퇴사자의 일상은 정말 여유로울까?

안정과 불안과 저항 그 사이 어딘가

춥고 긴 겨울을 지나 얼어붙은 만물이 깨어나는 것처럼 봄은 따스한 햇빛을 비추며 우리에게 수줍은 안녕을 건넨다. 그런 봄의 인사에 화답을 해야 되겠다 싶어서 옷가지를 챙겨서 설레는 마음으로 밖을 나선다. 유독 날이 좋은 때에는 회사에 있는 나 자신이 더욱 억울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와 같이 내 몸은 자유를 박탈당한 채 봄을 누리지 못하고 회사라는 철창 속에 갇혀있는 기분이었다. 매우 더운 여름이나 한겨울에는 오히려 실내에 있는 게 더 이득이다 싶었는데 봄이나 가을은 유독 퇴사 생각이 많이 나는 시즌이다. 내가 회사에서 일하고 있을 시간에 한가롭게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일까? 부자일까? 혼자서 부러움에 상상할 때가 많았다.


생각해보면 나는 중, 고등학교 때도 똑같이 이런 상상을 했다. 반항이라곤 할 줄도 모르고 늘 졸업식에서 개근상을 받아왔던 모범생인 나였지만 늘 마음속으로는 학교 땡땡이치고 일탈을 하거나 자퇴를 한 친구들이 부러워했다. 어느 날은 학교 수업 시간에 어디를 가야 했다.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총 합 9년 만에 학교 밖의 세상을 처음 맛보았다. 학생이라면 모두 학교에 있을 시간이기 때문에 지하철에서 교복을 입은 사람은 오직 나뿐이었다. 내가 일탈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짜릿했다. 그 시절 일탈에 대한 나의 억압된 욕망은 음악으로 표출되었다. 패닉의 “왼손잡이”가 나의 베스트 애창곡이었다. 뭔지 모를 저항정신은 나를 구성하는 가장 큰 뿌리 중 하나였던 것 같다.


결국 나는 완전한 독립이라고 할 수 없지만 현재 불안한 시간적 자유를 얻은 상태이다. 불안하다고 한 이유는 아직 부모님께 떳떳하게 놀고 있고 있다고(?) 말할 수 없는 나의 상황 때문이다. 불안함을 대가로 받은 여유를 즐기기 위해 산책을 하기로 한다. 천천히 걸어야지… 머릿속으로는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 내 발걸음은 점차 빨라지고 있었다. 나에게 여유를 허락하는 것에 익숙지 않았던 탓이었는지 또 불안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럴 때는 유튜브에서 배운 대로 나의 호흡에 집중해보자.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어본다. 순간 빠르게 뛰던 심장이 느껴진다. 의식적으로 한 발, 한 발 느리게 걸으려고 노력해본다. 사실 이것이 퇴사를 하고 1년 동안의 공백기를 가진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였다. 불안이다.


사실 이 불안함의 원인을 찾아 제거하기 위해서 1년 동안 부단히 노력해왔지만 내 속을 알리가 없는 이 녀석은 그림자처럼 내 뒤를 쫓아다녔다. 심리상담부터 시작해서 침도 맞고 한약까지 먹어봤다. 먹다 만 비타민과 한약이 냉장고에 쌓여있다. 한의사는 내가 급한 성격의 체질이라고 했다. 어째서 불안이라는 녀석은 멀어지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더 나에게 달라붙었다.


어머니는 늘 내게 ‘안정적인 직장’을 강조하셨다. 안정이란 무엇일까? 나는 안정을 찾아서 공공기관이나 공기업에서 회사생활을 했었다. 매달매달 꼬박꼬박 들어오는 월급은 나에게 경제적 안정을 주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화로울 수 있겠으나 마음은 늘 도망치고 싶던 순간들이었다. 이 세상에 안정적인 직장이 있을까? 한평생을 공무원으로 살고 정년퇴직을 하는 60대도 새로운 일을 시작해야 한다.


삶은 불확실성의 연속이다. 우리가 늘 가지고 다니는 핸드폰의 작은 네모창 안의 세상은 넓다. 당장 인스타만 보더라도 화려하고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 걱정하는 부분에 대해 당장이라도 해답을 주는 듯한 제목들은 성장에 대한 나의 불안과 욕망과 결핍을 이용하여 클릭을 부르게 한다. 그들이 돈을 벌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인지, 단지 내가 거기에 휘둘려서 그렇게 된 것인지 누구의 잘못도 따질 수 없다. 하지만 내가 그것에 영향을 받았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있는 것은 무엇인가? 우선은 내가 지금 불안한 상태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불안의 실체가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내가 생각하는 최악의 결과는 무엇인가? 원인은 내가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고 상대에게 거절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운 마음이었다.  어린 시절 누군가 나에게 

일탈을 해도 된다고, 그래도 괜찮은 거라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된다고말해줬었다면 어땠을까?




”나는 모든지 할 수 있다”는 자기 계발서에 등장하는 그 흔하디 흔한 클리쉐를 다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생각해보면 내가 죽어라고 기를 쓰고 했던 일이 꼭 다 잘되기만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더 해치고 힘들게 만들기도 했었다.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온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으면서 살았던 내가 부딪히면서 성장통을 겪고 있고 현재는 이 말로부터 조금씩 자유로워지고 있는 중인 것 같다.


나의 한계를 아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조금 더 멀리, 조금 더 빨리 가려고 하지 않고 나만의 페이스대로 여유 있는 삶을 살고자 한다면 말이다. 나에게 조금만 더 솔직해지고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하자. 그리고 그 나머지 것들은 기도해보자. 완벽해지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존재임을 인정할 때 비로소 온전해질 수 있다는 아이러니를 깨닫게 될 때 나의 삶을 진정으로 즐기며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20분의 짧은 산책을 가장한 경보를 하면서 카페에 왔다. 오늘 하려고 하던 업무들을 잠시 뒤로 하고 내가 좋아하는 코코넛 커피와 함께 소소한 일탈을 즐기려고 한다. 언제쯤 부모님께 솔직해질 수 있을까? 언제쯤 부모라는 태산을 넘어서서 온전한 나로 일어설 수 있을까? 이 방황이 길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솔직한 글쓰기가 나를 치유하고 또 인터넷이라는 창문 너머 허울뿐인 이 세상에서 내 글이 당신의 마음에 와닿기를 소망한다.




요즘 내 글을 구독하고 읽고 있는 사람이 늘고 있어서 행복하면서도 불안하다. 행복하면 그만이지 왜 또 불안하냐고 묻지 말아 달라. 그대는 이미 내가 수용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 글의 인기가 더 많아져서 이러다가 교보문고에서 내 책을 보게 되는 것은 아닌가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그때가 되면 가족에게 나의 일탈에 대해서 떳떳하게 말하게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서 동시에 혹시라도 엄마, 아빠가 내 책을 보게 되면 어쩌지 하는 생각까지 해봤다. 너무 배부른 상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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