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는 셔츠를 걷어 올려 이곳 저곳을 둘러보더니 병명을 알려주었다.
'장밋빛 비강진’
피부의 붉은 반점들이 아름다운 병명과 아이러니하게 어울렸다. 일주일전 옷을 갈아입다가 밑가슴에 부르튼 자국들을 발견했다. 늦가을 모기에 물렸구나 싶어 연고를 대충 발랐다. 며칠 뒤 그 자국은 배꼽을 넘어 사타구니까지 번져 있었다. 나체로 거울 앞에 섰다. 몸이 셀 수 없이 많은 두드러기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생각해보니 그 동안 피부뿐 아니라 몸에도 이상 신호가 있었다. 입술에는 헤르페스를 달고 살았고, 오후가 되면 아릿하게 아랫배가 저렸다. 깊게 잠들지 못하고 서너 번은 깨어났다. 무서운 병명들이 눈 앞을 맴돌았다. 점심시간에 식사를 거르고 회사 근처의 피부과에 들렸다.
장밋빛 비강진은 가려움을 동반한 붉은색 반점이 몸통을 중심으로 전신에 퍼지는 일종의 ‘피부감기’였다. 의사는 면역력이 약해진 몸에 곰팡이 균등 외부 바이러스가 침투하는 것이 주된 이유라고 설명했다. 습한 환경은 최대한 피하라고 권고했다. 그리고 ‘스트레스 덜 받기, 금주, 금연’을 덧붙여 강조했다. 처방약을 들고 거리로 나왔다. 점심시간은 10분남짓 남아있었다. 허기가 느껴질 새도 없이 이내 몸이 간지러웠다. 갈비뼈 주의를 긁으며 종종 걸음으로 회사로 향했다.
나의 첫 회사는 많은 단점이 있었지만 특히 참을 수 없는 게 두 가지 있었다. 바로 ‘술 고문’과 ‘지나친 관심’이었다.
술고문 파트를 담당하는 D는 나의 첫 팀장이었다. 그는 한마디로 권위적인 애주가였다. D는 건배 후 무조건 원샷을 고집했다. ‘밑장 깔기’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건배를 할 때면, 그의 잔보다 낮은 위치에서 잔을 부딪혀야 했다. 어른보다 높게 들어 치면 주도에 어긋난 행동이라고 화를 냈다. 매번 본인의 잔 아래로 고쳐주었다. 그는 술을 거절하는 것은 본인을 거역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왜 술을 억지로 권하냐’라고 용기 있게 항의한 어떤 대리님은 ‘되바라지다’는 이유로 1년 넘게 그의 괴롭힘을 감당해야 했다. D가 가장 선호하는 회식장소는 횟집이었다. 굽거나 조리해야 하는 수고로움이 없고, 자리 사이에 불판과 환풍기가 없어 서로에게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상대의 밑장을 감시하기에도 용이했다) 그의 술 사랑은 지독해서 ‘소주 만병통치설’을 펼치기도 했다. 내가 라섹수술을 했을 때도 눈이 맑아진다며 소주를 권했다. 몸살이 났을 때는 고추가루를 뿌린 붉은 소주잔을 내밀었다. 무엇보다 D는 술자리에서 잘 버티는 것 역시 업무의 중요한 역량이라는 생각했다. 취한 상태에서의 예의, 대화, 태도로 부하직원을 판단했다.
그렇게 퍼부어 마시면서도 D의 피부는 고려청자처럼 하얗게 윤이 났다. 벗겨진 이마까지 이어지는 넓은 면적의 피부가 횟집 조명에 반사되어 곱게 빛나곤 했다. 나는 손을 넓게 펼쳐 이마를 세게 때리는 상상을 했다. 와장창 그의 얼굴이 금이 가고 파편으로 흩어지는 장면을 머릿속에 그렸다. 그 정도의 상상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복수였다. 그 당시 나는 대학 졸업 전 첫 직장에 입사한 신입이었다. 회사의 모든 게 처음이었다. ‘넵’이라는 대답 외에는 모든 말이 어수룩했다. 같은 방향으로 팔과 다리를 휘저으며 걷는 고장 난 로봇장난감 같았다. 그래서 나는 거절할 생각은 감히 하지도 못한 채 동기들과 회식에서 버티는 법을 연구했다.
첫 번째 방법은 술을 뱉는 것이었다. 소주를 꿀꺽 삼키는 시늉을 한 뒤 , 물을 마시는 척하며 그대로 뱉었다. 단점은 취해버린 내가 그 뱉어버린 소주를 마셔버리는 일이 왕왕 있었다는 것이다. 횟집의 스테인리스 물컵은 두 번 뱉으면 가득 찰 정도로 용량이 적었다. 컵이 꽉 차면 그 뱉은 물을 도로 입안에 머금고 화장실에 가서 뱉었다. 두 번째 방법은 술을 몰래 버리는 것이었다. 큰 그릇을 바닥에 두고 몰래 그릇에 버렸다. 이 방법은 티가 많이 났다. 단체회식 자리의 끄트머리에 앉았을 때, D가 꽤 취했을 때만 쓸 수 있었다. 세 번째 방법은 술 대신 물을 채우는 방법 이었다. 근처에 앉은 동기와 눈빛 교환 후 서로의 잔에 생수를 따라 놓는 것이었다. 민첩한 손기술과 연기력이 필요했다. 빠르게 채워 넣고 아무 일도 없었던 척 해야 하는 노련함, 물을 원샷한 후 미간을 찌푸리며 ‘아이고 써’ 하는 자연스러운 표정연기가 동반되어야 했다. 마지막 방법은 정공법인 취한 척 이었다. 화장실에 립스틱을 챙겨 간 뒤에 광대와 콧잔등에 자연스럽게 발랐다. 자연스러운 메이크업 실력이 필요했다. 불덩이처럼 변한 얼굴로 다시 자리로 돌아가 양 볼을 때리거나 눈이 풀린척하며 힘겹게 웃었다. 그러면 마음이 약해진 D는 가끔 술잔을 채우는 속도를 늦추곤 했다.
이 모든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안타깝게도 회식은 대부분 취해서 끝났다. 회식의 왕으로 군림하는 D는 테이블의 사방팔방을 돌아다니며 어린 직원들을 모두 취하게 했다. 덜 취하거나, 막 취하거나, 개 취하는 정도의 차이일 뿐이었다. 나는 아득히 멀어지는 의식과 가방을 부여잡고 집으로 어찌 저찌 돌아오곤 했다. C도시에서의 두 번째 집은 신축빌라였고, 빌라촌 초입에 위치해있었다. 회사에서 집까지는 택시로 15분 거리였다. 회사사람들은 모두 내가 자취한다는 것을 알았다. D는 혼자 사는 여자는 특히 조심해야 한다며 택시를 태워 보냈다. (이미 버스는 끊겨 택시밖에는 선택지가 없긴 했다.) 번호판을 사진으로 남기며 집에 들어가면 문자를 하라고 당부했다. (그냥 술을 안 먹이는 게 제일 안전한 거 아닌가.) 문자를 깜빡하면 어김없이 부재중 전화가 남겨져 있었다. D는 그 다음날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냐며 잔소리를 했다. 나는 어이가 없었지만 ‘넵, 하하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웃었다.
서울의 거래처 사람들이 행사 참석을 위해 회사 행사장으로 왔다. 이리 저리 불러 다니느라 방광이 터질 지경쯤 화장실로 달려가는데 D가 나를 불러 세웠다.
“ 오늘 저녁 횟집 괜찮은데 예약해뒀어. 일정 끝나면 잘 모시고 가자.”
나는 변기에 앉아 참았던 오줌을 쏟아내면서도 하나도 개운하지 않았다. 퇴근 직후 바로 횟집으로 다시 출근 해야 하는 꼴이었다. 심지어 횟집은 의자가 바닥으로 뚫려있고 VIP룸이 분리된 지나치게 고급스러운 곳이었다. 매화A, 매화B 같은 비싼 일식코스를 소화하기에 접대비 예산은 넉넉하지 않았다. 접대를 가장해 비싼 안주를 먹는 자리였다. 참석인원이 한정될 수 밖에 없었다. 예상대로 그날 참석자는 거래처 사람과 D와 나 단 둘 뿐이었다. 40대 아저씨 3명과 소주잔이 넘실거리는 회식자리에서 나는 고독한 무인도처럼 고립되었다. 같이 버텨줄 동기도 없고 술잔을 버릴 여유도 없었다. 심지어 안쪽 자리에 앉아 D가 일어나야지만 화장실에 갈 수 있었다. 술자리는 평소처럼 선을 넘는 농담과 은근한 갑질로 채워졌다. 활어회에서 튀김으로, 매운탕으로 안주가 바뀌는 동안 나는 속절없이 취했다. 허벅지를 꼬집으며 정신을 차리려 안간힘을 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긴 술자리가 끝난 뒤 D는 평소보다 취한 나를 데려다 주겠다며 함께 택시를 탔다. 나는 최대한 꼿꼿하게 앉았다. 팀장은 ‘김주임이 술을 나한테 잘 배워서 꽤 늘었어.’ 하며 뿌듯하게 웃었다. 근처 편의점에 도착해 차를 세워달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위험하니 집 앞까지 가자고 했다. 어쩔 수 없이 빌라의 앞까지 안내했다. 도착했는데도 택시는 출발하지 않았다. D는 현관까지 들어가는 것을 봐야 안심이 된다며 버티고 서 있었다. 나는 왼손으로 도어락을 가렸다. 오른손으로 급하게 비밀번호를 눌렀다.
“비밀번호 내가 봐서 뭐하게! 안 쳐들어간다! 참나!”
그는 내 뒤통수에 대고 골목이 다 울리게 웃으며 소리쳤다. 그도 꽤나 취해 있었다.
나는 곧장 화장실로 갔다. 연거푸 3번을 토를 하고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출근시간에 맞춰 알람 10개를 맞췄다. 몸에서는 비릿한 회와 소주 냄새가 섞여났다. 속에 있는 걸 다 비워냈는데도 계속 토기가 올라왔다.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크게 뛰었다. 흉통을 죄고 있는 브래지어가 답답했지만 벗을 힘도 없었다. 나는 집으로 무사히 돌아온 내가 편안해진 건지, 안전해진 건지 알 수 없었다. 긴장이 풀리지 않은 채로 선잠이 들었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