툭 치면 외울 수 있는 긴 글들이 있다. 어릴 때 외웠던 시와 노랫말, 영화대사, 면접을 위해 준비한 1분 자기소개 같은 것들. 그중에서도 가장 자연스럽게 낭독할 수 있는 건 바로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이다. 기독교의 거의 모든 예배에서 암송되는 기도문이다. 감정이 고조되어야 하는 단어, 읊조려야 하는 부분을 여러 번의 낭독을 통해 잘 알고 있어서 나는 무교이지만 여전히 유창하게 두 기도를 외워낼 수 있다.
타의로 교회를 다니게 된 건 할머니 집에 합가하면서부터였다. 우리 가족은 내가 초등학생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조금 망했다. 그래서 할머니 집 2층의 작은 방으로 이사를 와야 했다. 할머니와 친척들과 살게 된 후 일상의 모든 것이 바뀌었다. 아침도 먹어야 했고, 혼자 있는 시간이 줄었고, 알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나는 그 정도에 그쳤지만, 엄마 경화의 상황은 더 안 좋았다. 아침을 차려야 했고, 시어머니 아니면 시누이가 곁을 맴돌았고, 대부분 대화의 주제로 오르내렸기 때문이다. 친가에서 유일한 기독교 신자는 할머니와 고모였다. 둘의 전도는 김씨 집안 남자들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더 쉬운 목표는 경화와 나였다. 경화는 불교와 더 가까운 무교였지만, 결국 교회에 가게 되었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였다.
교회는 그냥 가기만 하면 되는 곳이 아니었다. 성가대, 새벽기도, 편지쓰기, 봉사활동같이 해야 할 일이 정말 많았다. 그중에 가장 힘들었던 것은 바로 성경 암송대회였다. 고모의 두 딸은 모태신앙이었다. 사촌 언니들은 굳건한 믿음과 스펀지 같은 기억력으로 성경을 씹어먹을 요량으로 외워냈다. 다정한 언니들은 나에게 도움을 주려 노력했지만 나는 그저 반복해 읽기만 할 뿐이었다. 문장 사이에 생략되거나 빠진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고 그 틈을 이해해내고 싶었다. 나는 ‘그냥 외워’가 안되는 아이였다. 그해 암송대회에서 나란히 1, 2등을 한 언니들의 무대를 바라보면서 나는 도입부 구절에 머물러 그 뜻이 무엇인지만 한참 생각했다.
이듬해에는 여름 성경학교에 갔다. 성경학교는 방학을 맞은 초등부, 청년부 학생을 위한 일종의 수련회였다. 엄마 없이 잘 수 없다는 나의 고집은 통하지 않았다. 여름성경학교 스태프로 고모와 고모부 권사님이 참가했기 때문이었다. 고모 내외와 나를 포함한 서른 명 남짓의 사람들이 근교의 시골 동네에 도착했다. 낮에는 물놀이나 공놀이하고, 밤에는 예배를 했다. 이틀째 밤, 전도사님이 이끄는 촛불 기도회 시간이 있었다. 나는 입구에서 건네받은 작은 양초를 손에 들고 방의 중간쯤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미 기도를 시작하고 울고 있는 청년부 언니 오빠들이 있었다. 교회에서보다 더 격양된 분위기였다. 어두운 방은 크고 작은 기도 소리로 가득했다. 내가 촛불에 둘러싸여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모든 기도를 듣고 계신다’라며 전도사님이 내 어깨를 가볍게 감싸 쥐었다. 모든 기도. 모든 사람의 이야기. 나는 듣고 계신다는 말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모든 기도'가 무엇인지를 작은 방에서 오롯이 느낄 수 있었다. 각자의 바람, 고백, 한탄 같은 것들이 그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소리가 섞여서 짐승 울음소리처럼 들렸다. 나는 누가 울면 같이 우는 아이였다. 그래서 나는 그 방에서 와락 울었다. 그러다가 기도를 시작했다. 우리 가족 헤어지지 않게 해주세요. 우리 엄마 이불속에서 울지 않게 해주세요. 아빠의 눈빛이 돌아오게 해주세요. 종이를 찢거나 손톱을 물어뜯으며 참았던, 한 번도 입 밖에 내본 적 없는 이야기였다. 모든 기도 속에 나의 기도가 포개졌다. 얼굴과 손이 젖었고, 어깨가 흔들렸다. 멀리서 나를 지켜본 고모는 집으로 돌아와 할머니에게 ‘지혜가 믿음을 얻었다’라고 전했다고 한다. 그 말은 건너 건너 나에게 다시 전해졌다. 나는 그 믿음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는데 역시 이해하지 못했다.
몇 개월 뒤 우리 가족은 할머니 집에서 분가했다. 더 이상 아침은 먹지 않아도 되었고, 일요일에는 교회에 가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책장에 성경책이 있었다. 고모의 말처럼 믿음을 얻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문지방을 밟지 않고 베개를 세우면 안 되는 것과 비슷하게 성경책이라는 건 함부로 버리면 안 되는 물건 같았다. 몇 해 뒤 어느 날 엄마가 아빠와 따로 살게 되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여전히 아빠는 아빠라고 했다. 나는 그사이에 중학생이 되었고, 이해할 수 없는 말과 이해해야 하는 말을 구분할 줄 알게 되었다. 그날 밤 성경책에 손을 올리고 평범해지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것 같다. 그 후에는 엄마와 동생과 강아지 우유와 함께 살았다. 그러다 두 해 뒤 우유가 주사 쇼크로 내 방에서 쓰러졌다. 나는 동물병원에 우유를 입원시키고 돌아와서 우유가 쓰러졌던 자리에 성경책을 놓아두었다. 듣고 있다면 제발 살려달라고 기도했던 것 같다. 우유는 며칠동안 버티다가 병원에서 죽었다. 그 기도를 마지막으로 성경책은 내 책상에서 사라졌다. 누구에게 줘버렸는지, 잃어버렸는지, 버렸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성경책이 사라진 이후에 나는 무언가 빌고 싶은 기분이 들면 친구를 찾았다. 열일곱이 넘어서야 친구에게 속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친구는 간식을 나눠 먹거나 함께 걸으며 들어주었다. 성인이 되고 일을 시작한 이후에는 값비싼 물건을 사거나 가족에게 돈을 썼다. 가난함을 벗어난 기분 자체가 때로는 구원이 되기도 했다. 요즘의 나는 답을 듣고 싶을 때 글을 쓰거나 읽는다. 가끔 술을 먹거나 긴 호흡으로 요가를 하기도 한다.
여름성경학교와 기도와 성경책을 떠올리며 나의 종교에 대해 생각해본다. 종교적 의미의 ‘믿음’은 어떤 대상을 두려워하고 경건히 여기며 자비, 사랑, 의뢰심을 갖는 일이라고 한다. 나의 종교는 침묵이 되었다가 기도가 되고 친구와 돈, 글과 술로 모습을 바꾸고 있다. 원가족은 새로운 형태가 되고, 나는 어른으로 자라며 좀 더 단단한 껍데기를 둘렀다. 믿음은 어디에 있을까. 나는 그게 어디 있는지를 여전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흔들리는 촛불과 이해하지 못한 성경을 들고 헤맬 때 기꺼이 나머지 손에 붙잡혀 주었던 것. 그것은 소리 내어 나를 읽어내던 나였다는 것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