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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생각새싹

사슴과 헤어진 기린 이야기

by 어느좋은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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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에서 떨어져 외로이 초원을 거니는 기린이 있습니다

또래보다 몸집이 작아 무리에 끼지 못하는 시간이 많아졌고

그 시간들은 초원을 거닐며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초원의 풀빛이 좀 더 선명하던 어느 화창한 날

사슴이 다가와 말을 건넵니다

처음엔.. 사슴만한 몸집의 자신이 신기해서 다가왔겠거니 했지만

별을 닮은 영롱한 눈망울을 하고 살가운 말투로 이야기를 이어가는 사슴을 보고 있자니

어느 순간부터 고요하기만 했던 마음이 일렁입니다


둘 다.. 밤하늘에 펼쳐진 초원의 별을 좋아했고

서로의 온도에 의지한 채..

휑~한 초원의 밤바람을 버텨내며 함께 별을 보는 시간도 많아졌습니다


그렇게 함께하는 시간이.. 의지하게 되는 것들이 익숙해지려 할 때쯤

기린의 몸이 아파옵니다

친구들이 말하던 성장통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며칠을 앓았고.. 통증이 줄어들어 지친 몸을 일으켜봅니다

늘 봐오던 초원과 하늘의 경계가 평소와는 달리 보입니다

보다 넓고.. 보다 멀리까지 펼쳐진 풍경에 아직 남아있는 통증마저 잊혀집니다


상쾌한 기분으로 사슴을 보러 나서 봅니다

하지만 그 기분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사슴과 올려다보던 사과가 바로 눈 앞에서 보여지고 있었기에..

통증은 성장통이 맞았고

기린 역시 여느 기린들처럼 훌쩍 커버린 것입니다


많은 생각이 몰려옵니다

작다는 이유로 무리에 어울리지 못했던 시간들과

자신에겐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던 성장통이 지금에서야 찾아온 이유..

다시 작아지기는 어려운 상황에서.. 달라진 자신과 사슴 사이에

비집고 들어올 앞으로의 어려움들..

커버린 자신을 평생을 올려다봐야 할 사슴의 마음까지..

수 많은 생각들이 기린의 머릿속을 향해 줄지어 기다리고 있지만

우선은 눈 앞에 보이는 사과를 건드려 떨어트립니다



잊고 있던 통증이 다시 찾아오고.. 그보다 더 아픈 생각의 가시들 덕분에..

잠을 이루는 못하는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아 옵니다

기린은 어제보다 가까워진 하늘을 보며 결심을 했고


자신을 쉬이 알아보지 못하는 사슴 곁으로 다가가 꺼내기 힘든 말을 꺼내어 냅니다

넌.. 이제 나랑 안 어울려

나는 더 높은 세상을 보러 갈 거야


그게.. 마지막이었습니다

이런 차가운 헤어짐이어야만

시린 마음의 옷깃을 서둘러 여밀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기린의 통증은 멈추지 않았고.. 몸집 역시 계속 자랐습니다

무리에서는 물론이고 초원에서도 가장 큰 존재가 되었지만

기린은 더 높이 자라려 합니다

사슴이 좋아하던 별에 닿아보기 위해.. 그 별을 떨어트려 주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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