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로 인간 1 - 변화편 #8
지난 글에서는 우리 뇌의 회로를 덮어쓰는 신경가소성을 촉진시키기 위한 조건으로 패턴화와 감정적 흥분에 대해 알아봤다. 이번에는 복합 경험과 반복 경험에 대해 알아보자.
뇌는 복합적인 경험을 더 중요하게 판단해 신경가소성을 강하게 발동시킨다. 직립보행과 원주율 암기는 모두 엄청난 신경가소성을 요구한다. 하지만 직립보행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반면, 원주율을 열 자리 이상 외우는 사람은 드물다. 왜일까?
직립보행은 생존과 직결되는 복합 경험이다. 200개가 넘는 근육과 균형 감각, 시각·촉각 같은 여러 감각이 동시에 동원된다. 뇌 입장에서는 필수 과제라서 강하게 우선순위를 부여한다. 반면 원주율 암기는 숫자의 나열일 뿐, 생존에 직접적인 의미가 없기 때문에 회로 강화의 동기가 약하다.
그래서 무언가를 암기하거나 배우려 할 때 단순히 정보를 줄이는 것보다, 오히려 감각이나 맥락을 더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감각을 활용하는 전통적인 방법으로는 ‘기억의 궁전’이 있다. 예를 들어 처음 보는 책장의 순서를 외우려 한다면 이렇게 상상할 수 있다.
“그 기억은 궁전 정문 왼쪽 방 서랍 속에 있다. 방은 책장 테마에 맞게 앤틱 가구로 꾸며져 있고, 오래된 나무 향이 은은히 풍긴다. 서랍은 빨간색이고, 안에는 책 순서대로 카드가 꽂혀 있다. 카드 색깔은 책 표지 색과 같다.”
맥락 역시 강력한 도구다. 지구에서 달의 뒷면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외우는 대신, 달의 공전 주기와 자전 주기가 같아 항상 같은 얼굴만 보이게 된다는 원리를 이해하면 더 오래 기억된다. 기억할 내용은 늘어나지만, 회로는 오히려 더 또렷해진다.
우리 회로는 자연 속 생존 경험을 바탕으로 진화했다. 생존 상황은 항상 감각과 함께했고, 사회적 상황은 맥락과 체면으로 판가름났다. 그래서 감각과 맥락이 회로 형성에 친숙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를 일상에서 활용하는 방법도 다양하다. 예를 들어 업무 중에 누군가 자주 흥분한다면, 중재자가 미리 합의한 신호(손을 잡아주기 같은 촉각 자극)를 보내는 방법이 있다. 흥분 상태에서는 말이 잘 안 들어오지만, 감각 단서는 편도체의 주의를 끌어 흐름을 바꿔줄 수 있다. 루틴 동작을 만들어 집중력을 높이는 것도 같은 원리를 활용하는 셈이다.
욕망을 맥락에 묶어 변화를 시도하는 방법도 효과적이다. 연애 시절, 여자친구가 “담배 피운 지 1시간 이내엔 냄새 때문에 뽀뽀하기 싫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원래 금연할 계기를 찾고 있었던 나는, 그 말을 “담배를 피우면 뽀뽀를 못 한다”라는 선언으로 받아들였다. 아주 강력한 맥락적 동기부여였고 결과적으로 금연에 성공했다. 지금은 그 분과 결혼 10주년이 지났고, 여전히 뽀뽀에 지장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우리는 반복 경험이 회로를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의외로 많은 사람들은 내 회로에 축적되는 경험을 ‘선별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 가정에서 나는 자상한 사람, 직장에서는 믿음직한 사람, 백화점에서는 진상 고객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가정과 직장에서의 내 모습이 ‘진짜’이기 때문에 백화점에서의 행동은 가짜라고 치부하며, 나에게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신경가소성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야기는 다르다. 개인이 선택하고 행동한 모든 결과는 회로에 차곡차곡 쌓이고, 결국 통합되어 나에게 영향을 준다. 뇌는 다양한 조건에 따라 연결을 강화하거나 약화시킬 뿐, 개인의 선호에 따라 “이건 남기고 저건 버리자”는 식으로 거르지 않는다. 오히려 백화점에서의 모습처럼 감정적 흥분이 동반된 경험은 더 강하게 회로에 남을 확률이 높다.
물론 이렇게 쌓인 회로가 가정이나 직장에서의 나를 곧바로 바꾸진 않는다. 이미 그곳에는 강한 회로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로운 관계가 생기거나 기존 관계가 흔들리는 순간, 무심코 쌓아두었던 회로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신경가소성은 언제든 발사할 수 있는 총알처럼 내 안에 장전 되어서 기다리고, 적절하다고 판단된 순간에 나도 모르게 격발되는 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