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정시에 퇴근할 줄 알았다.

오수펌프에 대해서

by 원폴

“잘하면 정시에 퇴근할 수 있겠는데?”

사무실로 복귀하는 차안에서 내가 말했다.


오늘은
뭔가 '잘 풀리는 날' 이라고 생각이 들정도로

작업들이 착착착 해결되는 하루였던 것이다.


그렇게 여유를 느끼며 복귀하던 중에

갑자기...

새로 산 아이폰의 우렁찬 벨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뭔가 찝찝했다.
긴장되는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고,
그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빌딩 지하에서 냄새가 심하게 올라오고 있는데요.”


빌딩 관리를 하다 보면
언젠가는 반드시 마주하게 되는 상황이다.


빌딩의 오수는 정화조에 모여 처리된다.

정화조 마지막 단계에서의 오수를
빌딩 밖 오수관으로 내보내는 펌프가 있는데,
이 펌프가 멈추는 순간 문제는


‘고장’이 아니라 ‘재난’이 된다.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현장에 도착해 확인해 보니
펌프는 멈춰 있었고,
오수는 집수정을 가득 채운 채 범람해
공용 계단까지 흘러넘치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빌딩 전체가
지하에서 올라오는 악취로 뒤덮이고,
곧바로 민원이 쏟아진다.


나는 말없이 장화로 갈아 신고
펌프 문제인지, 컨트롤 패널의 전기 문제인지

확인하기 위해
망설임 없이 격실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렇지 않게 움직이는 나 자신을 보며

‘많이 성장했구나’ 스스로를 칭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안쓰러웠다.

IMG_2547.HEIC

천천히 한 걸음씩,
빗자루를 뒤집어 지팡이 삼아
돌다리를 두드리듯 바닥을 확인하며
펌프 패널 쪽으로 이동했다.


바닥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바닥 밑에 존재하고 있는


정화조라는 커다란 공간의 위치도
정확히 떠오르지 않았다.


혹시 뚜껑이 열려 있다면
그 순간은 상상하기도 싫었다.


한 발, 한 발.

마침내 패널에 도착했다.


수동 조작, 차단기 조작, 전류 감지까지
모든 방법을 시도했지만
펌프는 반응하지 않았다.


이건 전문가를 불러야 할 상황이었다.

일반 배수펌프라면
직접 교체가 가능하지만,
오수 펌프는 구조가 다르다.


센서 구조도 복잡하고

직결 전기 배선 방식이라

자칫하면 감전이나 2차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결국 협력 업체와 함께
내일 작업을 진행하기로 했다.


회사와 통화하고,
빌딩 관리자와 통화하고,
업체 사장님과도 통화했다.


오랜시간 통화를 했지만
온몸에는 아직도 냄새가 배어있었다.


빌딩 관리 일을 하다 보면
이런 상황들이 생각보다 자주 발생한다.


퇴근 시간이 다 되었지만
현장의 문제들은 퇴근 시간을 배려하지 않는다.


이런 일들은
누군가는 반드시 처리해야 한다.


오늘도

그 역할을 내가 하고 있다.


익숙하지 않거나 힘든 상황에서
나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곤 한다.


내가 힘들다면
남들도 힘든 일이고,


내가 꺼려지면
남들도 꺼려할 일이다.


아무도 하기 싫어하기에
그래서 이 일은 가치가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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