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 그리고 제주시까지
사흘은 짧다. 특히나 여행으로는.
떠나고 싶지 않은 숙소를 뒤로 하고 아침을 먹으러 나왔다. 제주도에서의 마지막 아침은 숙소 앞 카페에서 먹기로 했다. 호텔인 줄 알고 지나쳤던 문 안으로 들어가니 해변과 맞닿은 근사한 테라스와 하나씩 전부 먹어보고 싶은 디저트가 우리를 반겼다. 그중 우리가 선택한 건 흑임자 맛이 나는 화산섬 모양 케이크였다. 그늘에서 아침 바닷바람을 맞으며 먹는 케이크와 커피는 어디서도 비교하지 못할 맛이었다. 접시가 비어갈 때쯤 우리는 잠시 일어나 바닷가로 갔다. 여행 중 비는 한 방울도 떨어지지 않았고 이날의 날씨마저 환상적이었다. 잊지 못할 여행이다. 다음번에 제주도로 돌아온다면 그 이유에는 분명 이날의 기억이 있을 것이다.
협재 해변을 마지막까지 즐기곤 택시를 타고 서귀포로 갔다. 다음으로 갈 곳은 곶자왈 도립공원이었다. 곶자왈은 용암이 넓게 흐른 땅 위에 생겨난 ‘제주의 허파’다. 수많은 동식물이 살아가고 있는 데다 울창한 숲그늘 아래 산책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우리가 있던 한림에서 서귀포까지는 자동차로 25분 정도를 가야 했다. 마침 이때 만난 택시 기사님이 재밌는 분이셔서 더 즐거운 시간이었다. 기사님은 귤이 안 달려 있으면 귤나무도 구분 못 할 정도로 꽃과 나무에 무지한 우리에게 한숨과 탄식을 섞어 몇 가지를 알려 주셨다. 택시에서 내리기 전쯤 ‘말해줘 봐야 잊어먹을 텐데 뭘…’ 하시더니 실제로 지금은 기억이 하나도 안 난다. 지금 생각해 보니 뭐가 그렇게 재밌어서 곶자왈까지 가는 내내 친구와 그렇게 웃었는지 모르겠다. 여행이라는 게 자연스럽게 경계를 풀고 웃음에 쉬워지게 하는 것 같다.
곶자왈 도립공원에는 여러 개의 코스가 있어 난이도와 시간을 보고 코스를 정할 수 있다. 우리는 가장 짧고 쉬운 코스인 테우리길을 지나 전망대를 구경하고 돌아오기로 했다. 최약체 코스답게 데크가 깔려 있어 어지간한 오르막에도 걷기가 쉬웠다. 무엇보다 어스름한 그늘 아래서 빽빽한 나무들의 습기와 바람을 느끼면서 걷는 게 정말 기분 좋았다. 나무마다 이름표가 달려 있고 중간중간 곶자왈과 제주도의 환경과 관련된 퀴즈까지 붙어 있었다. 우리는 현장학습 온 초등학생들보다 신이 나서 전망대까지 걸음을 옮겼다.
탁 트인 공터가 나오고 그 가운데 전망대가 혼자 높이 솟아 있다. 계단을 올라갈수록 바람이 강해졌다. 꼭대기 층에서는 도립공원 한복판에서 우리를 둘러싼 숲을 빙 돌아볼 수 있다. 전망대 바로 앞에 있지만 1층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던 연못까지 한눈에 보였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보이는 오름들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게 사진이 붙어 있었는데, 사진과 멀리 보이는 오름을 비교해서 이름을 찾아내는 재미가 있었다. 전날 우리가 갔던 금오름도 보이니 더 반가웠다.
그냥 숲 속에 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전망대에서 내려오고 바로 돌아가기는 아쉬워서 30분 정도 걸린다는 빌레길에 들어가 보기로 했다. 사실 이때부터는 체력도 조금 떨어지고 길이 테우리길보다 훨씬 어려워져 괜히 왔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빌레길에 산다는 동물들을 모티브로 만든 마스코트 캐릭터가 정말 귀여웠다. 도마뱀을 만나고 싶었는데 너무 작아서 찾지 못한 건지 우리 눈엔 보이지 않았다.
중간에 돌아갈걸 하면서도 빌레길 끝까지 갔다가 돌아오고 나니 벌써 점심시간이 지나 있었다. 이미 봐둔 갈치조림 식당으로 가려면 공항이 있는 제주시로 가야 했다. 짐을 들고 다녀야 하는 상황이라 공항에 먼저 가서 짐을 맡겨두고 다시 시내로 나오기로 했다. 우리에게 신기했던 점은 제주공항은 시내버스가 다니는 도심 한가운데 있다는 점이다. 이 날 세 번이나 공항을 지나갈 줄 모르고 우리는 짐을 맡긴 뒤 신나게 식당으로 향했다.
꽤 인기가 있는 곳인지 점심도 저녁도 아닌 애매한 시간인데도 식당이 꽉 차 있었다. 갈치조림 소 자와 공깃밥을 시키자 따뜻한 국물과 반찬들이 같이 나왔다. 두툼하게 토막 낸 갈치 살에 국물을 듬뿍 묻혀 뜨거운 밥에 올려 먹었다. 양념이 졸아든 양파와 무를 올려 한 숟갈씩 열심히 떠먹었다. 사흘 동안 친구와 그렇게 한 마디도 없이 밥만 먹은 게 이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밥을 다 먹고 식당 밖으로 나오니 4시 정도 되어 있었다. 비행기는 9시 출발 예정이었고 이제는 딱히 별 계획이 없었다.
제주시의 소품샵이나 빈티지 옷 가게를 좀 구경하다 동문시장에서 군것질을 하고 공항으로 가기로 했다. 인스타에서 본 옷가게로 버스를 타고 가는데 도중에 버스 타이어가 터졌다. 버스가 쇠 긁히는 소리를 내며 몇 발 더 기어가다가 결국 안 되겠다 싶었는지 기사님이 모두 내려서 다른 버스를 타달라고 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내리고 우리도 모르는 길 한가운데서 다른 버스를 다시 찾아야 했다. 여행 중이라선지 타이어가 터졌다는 것도 왠지 웃겼다. 새 버스를 타고 가는데 또 한 번 제주공항을 지나갔다. 낮에 짐을 맡기고 나올 때 탔던 버스가 흔들리면서 천장에 머리를 박았는데 이번 버스도 롤러코스터와 같은 움직임으로 공항을 빠져나왔다.
우리는 영화의 거리 안에 있는 구제의류샵에 들어갔다. 좁은 계단을 빙빙 돌아 올라가면서 보이는 스티커와 소품들을 보는 재미가 있었다. 마침 그날은 반팔티 할인행사를 진행 중이었다. 해외 스포츠팀 로고가 그려진 프린팅 티셔츠들이 수백 장이었다. 구제옷 구경은 언제나 재미있다. 유행이 만들어졌다가 몇 년 뒤 구닥다리 취급받고 또 몇 년 뒤에는 길거리에서 발에 차이듯 많아지는 흐름이 눈에 보인다. 이다음으로 갔던 곳은 이름답게 길모퉁이에 있고, 두 명이 나란히 걸을 수 없을 만큼 좁다란 공간이었는데, 그 안에 의류와 잡화가 옥수수알처럼 빼곡히 걸려 있었다. 이런 재미있는 공간들을 둘러보다 보니 계획 없는 오후가 잘만 흘러갔다.
마지막 일정은 동문시장 탐방이었다. 옷가게에서 시장까지는 가까웠다. 제주목관아를 지나 걷다 보니 작은 하천과 맞은편의 유명한 아이스크림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우선 기념품과 다른 먹거리를 먼저 구경하고 나오는 길에 아이스크림을 사 먹기로 했다. 동문시장 안은 선물로 사갈 먹거리를 사가려는 여행객들로 북적였다. 귤이나 한라봉 모양의 기념품들은 가게마다 종류가 비슷했지만, 그중 하나 눈에 띄는 게 있었다. 나는 보통 여행 선물이라도 장식품보다는 간식거리를 사 오는 걸 좋아하지만 이날은 내 가방에 달 귤 키링을 하나 샀다. 흰 속껍데기까지 충실하게 표현된 그 가짜 귤 한 조각이 너무 귀여웠다. 우리는 각자 키링과 청귤잼, 우도땅콩샌드, 한라봉타르트 같은 것들을 가득 사들고 나와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우유향이 진한 아이스크림으로 채운 소금빵을 먹으면서 공항에 가기 전까지 강가를 걸었다.
마지막 날 계획이 워낙 허술했기에 이제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더 아쉬웠다. 좀 더 돌아다녀 볼까 했지만 마침 비가 와서 공항 가는 버스를 탔다. 제주도 와서 처음 맞아보는 비였다. 유독 사람이 많은 제주공항을 열심히 헤치고 지나가 탑승구를 찾고 앉아 있었다. 다음날 알바가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즐거운 시간이었다. 몇 년 전의 나는 여행을 거의 다니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어느 순간 일 년에 최소 한 번은 바다를 보고 와야겠다 마음먹었다. 여행을 준비하는 시간처럼 설레는 게 없다. 집에 도착했을 때의 피곤함과 ’ 내일은 또 뭐 해야 하지?‘ 하는 탈력감도 그만큼 크지만. 실은 내 일상이 더 안정되고 내 자리를 찾으면 그런 허무함도 줄어들 걸 알고 있다. 이 일기의 제목을 백수의 여행이라 붙인 것도 그런 생각을 완전히 외면하지 못한 채 제주 여기저기를 쏘다녔기 때문이다. 다가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도 전에 이륙 지연 소식이 들려와 머릿속이 깨끗이 비워졌다. 김포공항에 도착하면 11시에 출발하는 마지막 공항버스를 타고 갈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그 버스를 놓치면 우리에게 남은 옵션은 공항 노숙 또는 택시비 10만 원뿐이었다. 이 피곤한 와중에! 그러자 집이 무엇보다도 그리워졌다. 도착할 때까지 서로 ‘설마, 설마’ 하면서 초조하게 웃었다. 다리를 달달 떨며 우리 둘의 수하물을 모두 찾아 공항 밖으로 뛰쳐나갈 때 시계를 보니 정확히 10시 59분이었다.
원래 그런 건지 천운인지 버스가 11시 01분에 도착해 가까스로 탈 수 있었다. 푹신한 좌석에 몸을 눕히고 친구를 돌아보는데 마냥 웃음만 나왔다. 그래 마지막까지 진짜 운 좋은 여행이다. 집에 가는 게 왜 무서워? 못 갈까 봐 5분 전까지 오들오들 떨었는데. 우리는 무사히 집에 도착해서 다음날 나는 알바를 갔고 커피를 내리는 와중 짬이 날 때마다 친구한테 또 놀러 가고 싶다고 카톡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