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의 여행 제주도 편 2

제주 서쪽에서 열심히 먹고 걷다

by 교한동




둘째 날 아침이다. 전날 매우 야심 찬 계획을 세웠던 우리는 일찍부터 하루를 시작했다. 빵과 커피를 조식으로 먹은 다음 첫 목적지는 제주도 하면 유명한, 우뭇가사리 푸딩을 파는 곳이었다. 거리는 도보 30분. 용감하게도 평소 심심하면 걷던 걸 떠올리면 30분은 껌이라며 숙소를 나섰다. 우리 앞에 성큼 다가온 한낮의 초여름 기후를 생각하지 못한 채…




날이 더워서인지 자전거 몇 대와 차 여러 대는 지나가도 걷는 사람은 우리뿐이었다. 그나마 해안선을 따라 걷다 보니 돌담집 사이사이 보이는 파란 수평선이 끝까지 걸어갈 힘을 줬다. 대기가 많을까 걱정했지만 목적지에 도착하자 손님은 우리뿐이었다. 평일 오전이라 사람이 몰리기 전이었던 것 같다. 생각해 보면 이날은 하루종일 타이밍이 좋았다. 커스터드푸딩을 하나씩 사 버스 정류장에 서서 먹었다. 적당한 달달함에 탄탄한 기본기가 느껴지는 우유와 달걀 맛이 더해져 잠시나마 더위가 두렵지 않은 맛이었다.




버스를 기다리며 바로 앞의 소품샵에서 반지를 하나씩 샀다. 각자 손을 펼치고 사진을 찍다 보니 202번 버스가 왔다. 공항으로 갈 때를 빼고는 사흘 내내 202번 버스만 탔다. 일부러 골라 탄 건 아니지만 검색하는 목적지마다 최단거리를 찾으면 202번부터 타야 했다. 나중에는 전용 리무진이 다가오는 것처럼 반가웠다. 그렇게 20분 정도 달려 도착한 곳은 월령리 선인장군락이다. 우리에겐 선인장 자생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신기했는데 이 멕시코에서 온 선인장을 돌담에 심어 뱀과 쥐가 들어오는 걸 막았다는 게 왠지 재밌게 느껴졌다. 타이밍이 좋았던 이번 여행답게 우리가 길 끝까지 갈 때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가 시작점으로 돌아올 때에야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별 거 아닌 일도 꼬투리를 잡아 오늘은 운이 좋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다음 목적지까지는 버스를 10분 타고 20분 걸어야 했다. 전날 세운 계획으로는 신창풍차해안도로로 가 전동바이크를 탈 예정이었다. 어차피 원래는 내내 걸으려던 거 바이크 타기 전에 20분쯤 걸을 수 있지! 그런 마음으로 짧은 버스 구간을 즐겼다.




판포포구를 지나 버스에서 내린 다음 마늘밭 사이를 한참 걸었다. 이름답게 풍차가 심심찮게 보였다. 구름이 없고 해가 뜨거웠는데도 가까이 갈수록 바람이 시원해져서 땀이 나지 않았다. 물론 안 더웠다는 이야긴 아니고… 그냥 정신없이 앞으로만 걷다 보니 전동바이크 대여와 카페를 겸하고 있는 건물이 나왔다. 가게 한구석에서 졸고 계시던 할아버지 사장님이 귀를 기울여야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코스를 자세히 설명해 주셨다. 전동바이크는 면허가 있고 자전거를 탈 줄 안다면 누구나 탈 수 있다. 잠시 쫄았다가도 그 사실에 마음을 다잡고 시동을 걸려던 우리에게 사장님은 뼈가 되고 살이 되는 한 마디를 속삭여주셨다. “보험처리도 안 되니까는 조심하고…” 다행히 간단한 조작법을 기억하고 속도에 과하게 욕심내지만 않으면 사고가 날 가능성은 적다. 여행 마지막 날까지도 친구와 나 둘 다 이번 여행에서 최고의 경험이었다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처음 십 분 정도는 코앞의 길만 쳐다보느라 경치를 즐기지 못했다. 하지만 적응된 다음부터는 여기 오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다. 앞서 가는 친구의 헬멧 쓴 뒤통수를 보며 기분이 좋아 혼자 노래를 부르고 왼쪽으로 굽어지는 길을 따라가자 오른편에 살면서 처음 보는 듯한 바다가 펼쳐지던 때가 마치 어제 같다. 한 시간이 왜 이리 짧을까! 운전은 안 해도 면허 따기 잘했다. 전동바이크를 타고 해안도로를 달릴 수 있으니까(면허가 없으면 페달이 있는 전기자전거를 타면 된다).




다음으로는 늦은 점심을 위해 버스로 지나왔던 판포포구로 갔다. 한적한 해변과 면하고 있는 해물라면집이 우리의 목표였다. 해물라면과 문어라면을 하나씩 시키고 야외 좌석에 앉았다. 라면에 문어에 홍합에 전복이라니 이게 무슨 호사인가? 도대체 라면 국물이라는 게 이럴 수 있나? 제발 밥 반 공기만 뜨고 싶었다. 아쉬운 대로 국물만이라도 다 빨아들이고 있는데 현지인인 것 같은 고양이가 왔다. 뭐 하나라도 주고 싶었지만 해물이란 해물은 빨간 기름이 뜬 국물에 푹 젖어 줄 수가 없었다. 제주에 왔으니 오름은 한 번 올라보자고 했다. 그다음 향할 곳은 금오름이다. 수많은 오름 중 금오름을 선택한 이유는 숙소가 있는 한림읍에 위치해 있으며 인스타에서 본 멋진 사진 때문이었다. 그중에는 말이 돌아다니고 있는 사진도 있었고 야트막한 언덕을 뒤집어 놓으면 꼭 맞을 것처럼 오목하게 파인 채 풀밭으로 둘러싸인 모습이 퍽 평온해 보였다. 입구부터 낮은 경사길을 십 분쯤 걸으면 되겠거니 하며 우리는 금오름 초입까지 택시를 잡아 탔다.




하지만 그곳은 패러글라이딩의 명소였으니… 금오름의 난이도는 별 세 개 정도로 각 잡고 등반해야 하는 곳은 아니지만 우리가 상상한 산책길 수준도 아니었다. 올라갈수록 건너편 목장의 말들이 손톱만 해 보였고 바람이 거칠어졌다. 하지만 친구를 달래 가며 끝까지 올라 금오름을 한눈에 담는 순간 역시나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전 비가 와서인지 사진에서 봤던 것과 달리 가운데 물이 고여 있었다. 넓은 오름 앞에 서서 눈부신 연못을 오래도록 내려다보았다. 오름을 반 바퀴 돌아 반대쪽까지 가서 조심조심 연못까지 내려가보기로 했다. 정상은 바람이 더 거세어서 모자가 날아가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지금껏 본 적 없는 광경이었다. 남이 이곳에 와서 찍은 사진에서도 본 적 없는 광경이었고. 이런 곳을 걷고 있으면 내 방에 누워 핸드폰을 붙잡고 있던 나는 내가 아닌 것 같다. 세상을 액정으로 구경하며 바쁘게도 부러워하던 시간들도 가짜 같다. 마음이 허할 때는 어쩌면 남의 인생 한 조각도 그렇게나 부러울까! 가끔 어렵게 떠나는 여행은 그 부러움을 떨칠 힘이 된다. 나는 주워 온 모자를 꼭 붙잡고 여기저기서 사진을 찍었다. 어느 각도에서도 오름 안에서 받은 느낌을 담을 순 없었다.




오름에서 내려와 숙소로 돌아오자 우리 둘은 드러누워 버렸다. 걸음 수를 보니 이미 2만 보를 훌쩍 넘었다. 친구는 전날 계획을 짤 때도 설마 이걸 진짜 다 하겠어 싶었다고 한다. 일찍 일어나서 그 모든 것들을 해내고도 저녁식사를 여유롭게 즐길 시간이 남아있었다니 매우 행복했다. 우리는 잠시 쉬다가 다시 밖으로 나가서 숙소 앞 기념품점에서 집으로 가져갈 과자를 잔뜩 사고 애월로 가는 택시를 탔다.




여기는 애월. 우리는 한 새우 전문 음식점에서 코코넛새우와 로제 소스를 얹은 새우 요리를 시켰다. 시킬 때는 몰랐지만 로제 소스 아래 오므라이스가 있어 쌀이 부족해 허전하던 마음을 채워줬다. 코코넛을 좋아하지 않는 친구도 먹어보니 맛있다며 그릇을 전부 비웠다. 그리고 이 날은 전날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집에 돌아가기 전에 물회를 배달시켰다. 우리보다 먼저 도착한 삼치물회는 기다린 만큼 새콤하고 시원하니 정말 맛있었다. 오랜만에 먹은 삼치는 쫄깃하고 야채와 함께 기분좋게 씹혔다. 수저가 한 벌만 온 것도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게 모든 끼니를 첫 끼처럼 해치우곤 여행 마지막 날을 위해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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