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름에 휩쓸린다면 늦은 것이다
넷플릭스의 <블랙 미러> 시리즈를 보다보면 너무 현실로 다가올 것만 같아 두려웠다. 기술적 진보로 인한 소셜미디어의 폐해 등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문제까지도 나는 공포스럽게 느꼈다. 그런데 그런 불안감을 날릴 만큼 더 충격적인 기술에 대해 알게 되었다. 바로 케빈 데이비스의 <유전자 임팩트>라는 책을 통해 CRISPR라는 기술을 말이다. 크리스퍼는 쉽게 말해 유전자 가위다. 아직 먼 훗날에나 다가올 일이라며 SF영화에나 나올 법한 일이라며 별 생각도 하지 않고 있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
사실 책을 읽고 있으면서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 기술은 지금까지의 그 어떤 기술보다도 쉽고 빠르고 저렴하다는 큰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규칙적인 간격으로 분포하는 회문 구조의 짧은 반복서열 Clustered Regularly Interspraced Short Palindromic Repeats’를 뜻하는 영어 표현의 앞 글자를 딴 이름인 크리스퍼 CRISPR는 세균이 특정 바이러스로부터 공격 받을 때 그 영향을 약화시킬 수 있도록 자연적으로 발달한 일종의 방어망이며 세균 면역체계의 중요한 구성요소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 케빈 데이비스 <유전자 임팩트> 중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유전병을 일으키는 원인을 정확히 찾아 잘라내어 원래 없었던 것처럼 만들 수도 있다. 실제로 2019년에 빅토리아 그레이라는 흑인 여성이 유전자 편집 기술로 겸상 적혈구 질환의 치료를 받은 첫 미국인 환자가 되었다. 이 기술이 반가운 이유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치매가 발병하지 않도록 조치하고 우주비행사의 방사능 노출 피해를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멸종 생물을 다시 살려낼 수도 있고 영양소가 풍부한 작물을 길러내어 기아문제나 영양부족 문제를 근본적으로 없애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원인을 모를 병에 대한 불안감이 크리스퍼로 인해 사라질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유전자를 조정해서 수면 시간을 줄인다거나 면역 기능을 발휘하는 핵심 유전자의 활성을 없애는 생물무기 제작에 쓰인다면? 돈이 많은 이들이 우수한 아기를 만들어내는 데 이 기술을 쓴다면? 예전에는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픽션같은 이야기라 웃고 넘어갈 수도 있을 이야기가 이제는 너무나도 가까운 현실로 다가와버렸다. 게다가 실제로 유전자 편집 기술로 에이즈에 대한 면역이 생긴 쌍둥이 아이가 실제로 탄생했고 그 프로젝트를 진행한 과학자는 감옥에 가게 되었으니 말 다 했다.
우리가 이 책을 읽으며 단순히 공포에 떨고 새로운 기술을 거부해야 한다는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뭔가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기시감같은 게 느껴지지 않았나 질문하고 싶다.
우리는 원자력발전에 대해 아무런 거부감없이 받아들여왔다. 우리가 논의할 새도 없이 곳곳에 원전이 세워졌고 초반에는 원전을 통해 장미빛 미래가 그려질 것 같은 이미지 메이킹이 시도되었다는 게 이상하지 않게 느껴질 정도다. 지금 우리는 시간이 지나 그 책임의 무게를 어느 정도 느끼고 있다. 하지만 또다시 먹고사니즘에 치여 앞으로 원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될지 기후문제가 어떻게 될지 별 생각조차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당장 원전 제로를 외칠수없다는 것도 안다. 그러니 다양한 대체 에너지를 위한 노력, 셰일 가스에 대한 관심도 지대하다는 것도 말이다. 그런데 결국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그 피해는 먹거리로 돌아올수밖에 없다. 방사능 오염에 노출된 먹거리에 피해를 입는 것은 전세계 국민 모두다. 특히 미래 세대인 아이들에게 그 피해가 막강하게 돌아간다. 우리는 그 기술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이게 최악의 상황에서 우리에게 어떤 시나리오가 떨어질지 준비하고 고민해야한다. 기술을 받아들였을 때 닥칠 피해를 막을 2차 대안을 함께 가지고 가야한다.
장기적으로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는 일일수록 일상 속에서 그다지 크게 느껴지지 않는 법이다. 하지만 서서히 우리의 숨통을 조여온다. 지금 미국과 중동, 중국, 러시아 등의 국가가 부딪히고 있는 문제의 상당부분이 에너지 문제다. 미국이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고 세계 경찰과도 같은 역할을 유지하려고 하지만, 사실 미국이나 유럽의 이런 태도 때문에 중동, 중국과의 문제가 더 심해지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좋은 기술이 국가적 합의가 된 다음에 사용되어야 한다고 미국이 말하면서도 모순된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중국이나 중동, 러시아와 같은 미국이나 유럽과 적대적인 국가들이 악용할까봐 발을 동동 구르는 미국과 유럽의 모습이 얄밉다고 해야할까? 어떤 특정한 절대악이 존재해서 문제를 일으키는 게 아니라, 선민의식을 가진 배타성을 가진 이들이 문제를 일으킨다고 생각한다. 중대한 문제에 무관심한 대중이 이런 문제를 야기하는 주범일수 있다.
크리스퍼 기술에 대한 규제는 장기간에 걸쳐 많은 사람들이 대화를 통해서 함께 머리를 맞대야할 문제다. 누군가 대단한 해결사가 나타나 우리의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해줄 것이라 생각하면 안된다.
이 책을 보면 영화 <가타카>가 떠오르지 않을수없다. 나는 기술이 가져올 장미빛 미래보다 기술없이도 인간이 자기 잠재성을 뛰어넘는 것에 기대를 가지고 있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다. 그 가능성을 유전자를 재편집해서 단숨에 해결한다는 건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좋은걸까 생각해보게 된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꽤나 흥미로웠던 점은 어떤 문제해결을 하려고 덤벼들어서 찾아낸 게 아니라, 많은 관심을 얻지 못해도 소박한 지원을 겸허히 받아들이며 자신의 일을 묵묵히 수행한 과학자들로 인해 우연히 발견하게 된 기술이라는 점이다. 순전히 자신의 즐거움과 호기심만으로 움직이는 이들의 가치가 제대로 평가될 수 있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