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건 진정 connecting dot 이네요
수능이 끝난 직후였다. 반 친구 모두가 대학 합격여부에 상관없이 남은 학기 학교에서의 생활을 방학처럼 보내고 있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마지막 휴가라도 되는 것처럼, 지금까지 수능만을 바라보며 달려온 우리의 수고를 보상하기라도 하듯이 우리는 학교에 가면 종일 놀았다. 방송반에서는 영화를 틀어주었고, 몇몇 아이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영화를 가져와 담임 선생님께 틀어달라고 했었다. 또 어떤 아이들은 만화책을 엄청 많이 빌려와서 수업시간마다 친구들과 돌려보곤 했었다. 나도 그중 한 사람이었고 그 짧은 기간 동안 만화책을 미친 듯이 엄청 많이 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부터 인기 절정이었던 만화 '원피스'를 보지 않았던 이유는 클리셰 범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열정에 가득 찬 주인공이 동료들을 하나둘씩 만나 보물 '원피스'를 찾고 해적왕이 되기 위해 싸우는 모험 판타지물이라니. 중간중간에 역경과 고난이 있을 것이고 그럼에도 그들은 이겨낼 거라는 게 뻔히 보였고 특히나 구미가 당기지 않았던 것은 여자 캐릭터들이 하나같이 노출이 심하거나 몸매가 너무 드러나는 옷을 입어서였다. 흔하디 흔한 소년만화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주위 친구들이 강력하게 추천을 했음에도 원피스를 보지 않았다. 신뢰하는 친구가 "네가 좋아하는 요소들이 가득 있어. 너라면 좋아할 거라 장담해"라고 했음에도 말이다. 그렇게 나는 원피스를 보지 않았다.
그러다가 언제 원피스를 처음 보게 되었는지 정확한 계기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좋아하던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서 '원피스'를 좋아하는 연예인들이 모여 왕중왕을 가린다는 퀴즈대결을 펼친 것을 보아서였는지도 모른다.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인기 있는 것에는 이유가 반드시 있겠구나'라며 그때 처음으로 '원피스'라는 만화가 궁금해졌다. 그냥 속는 셈 치자며 원피스를 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만화책으로 보다가 애니메이션은 어떤지 궁금해서 비교해서 보게 되었다. 그 이후로는 성우들의 연기, 만화책에서는 느낄 수 없는 역동적인 영상들, 그리고 오프닝 음악들 때문에 아예 애니메이션으로 갈아타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원피스에 빠졌다.
대결이 질질 끄는 것 같으면 빠르게 넘어가서라도 계속 보았다. 어떤 에피소드는 별 기억에 남지 않았지만 몇몇 에피소드는 나의 심장을 뛰게 만들었고 부끄럽지만 펑펑 울기도 많이 울었다. 그들이 동료로 합류할 때의 에피소드들뿐만이 아니라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면서 만나는 적들과의 대결 속에서도 나는 많은 것을 느꼈다. 내 심장은 뜨거워졌고 원피스가 미치도록 재미있었다.
그러다가 광적인 흥분이 어느 정도 가라앉던 어느 날, 나는 원피스 보기를 그만두었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을 만큼 스토리의 끝이 보이지 않아서 잠정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그리고는 원피스는 잊혀졌고 원피스는 나에게 엄청나게 재미있는 만화였지만 언젠가 엔딩이 나면(그리고 여유가 생기면) 다시 볼 만화 리스트에 올라가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매스미디어 키즈답게 다른 재미있는 콘텐츠들로 넘어갔고 콘텐츠의 늪에 빠져 살았다. 그러다가 현실은 나에게 더 이상 이런 콘텐츠의 소비자로만 살다가는 내 삶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주 냉혹하게 알려주었다. 그렇게 나는 나의 행복이라고 믿었던 콘텐츠 소비를 잠시 중단했다. 금연하듯 끊을 수 없지만 끊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되도록 그것들을 멀리했다. 그렇게 나는 금욕(콘텐츠)주의 생활을 하며 자기 계발에 빠져 지냈다.
그렇게 한동안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운동을 하며 하나둘씩 알게 된 것들이 연결되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매일 책을 읽었고 매일 달렸고 매일 새로운 생각을 하며 반성했다. 새로운 시도를 하고 실패하고 다시 계획을 수정하고 시도하고를 반복했다. 다시는 콘텐츠만을 소비하던 과거로 돌아가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열심히 하는 것 역시 내가 사랑해마지않았던 콘텐츠들을 죄책감 없이 소비하기 위함도 있었다.
우린 뻔한 걸 싫어한다. 하지만 그 뻔함 속에서 안정을 느낀다. 우리가 스토리(콘텐츠)를 쉼 없이 찾아 헤매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뻔하지만 뻔하지 않는 얘기들에 환호하고 거기에 돈을 기꺼이 낼까. 이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던 도중 갑자기 원피스가 생각이 났다. 원피스의 어떤 부분이 나의 본능을 자극한 걸까.
나는 동료들과의 뜨거운 우정, 성장하고 역경을 이겨내는 스토리에 열광을 했던 것이다. 자기계발을 하는 것도 나의 경제적 자유를 위한 것이었는데 그 이유도 다 멋진 동료들과 함께 재미난 일을 하기 위함이었다. 회사에 다니면서 '왜 일을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엄청나게 한 적이 있었다. 돈을 벌기 위함이고 내 한 몸뚱이 건사하기 위함이었지만 그것뿐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회사에서의 짧지 않은 시간 중에 내가 불행하다면 나는 하루의 1/3은 견디면서 살아야 하는 걸까. 그리고 퇴근 후에 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콘텐츠를 끊임없이 소비하면서?
나는 일에서도 즐겁고 싶었다. 즐거운 일만 하고 싶다는 안일한 생각이 아니라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의 시간이 고역으로 느껴지지 않았으면 했다.
나는 '안된다'라고 말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기 싫었다. 시도해서 실패할 수는 있지만 그걸 처음부터 안 되는 이유 수만 가지를 나열하는 사람들과는 좋아하는 일을 하다가도 속 터져 괴로울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열심히 죽어라 살기 싫을 것이다. 자기 계발로 하루 일분일초를 쪼개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숨 막힐 수 있다. 그저 일정 금액의 월급 받으면서 퇴근 후 소소한 취미들을 하는 게 행복일 수 있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게 행복하지 않았다. 소소한 취미가 뭘까. 사람마다 다르고 정답조차 없다. 난 해결이 안 되어서 답답한 문제를 해결해냈을 때의 희열을 즐긴다. 그게 임대료 수익이 매달 안정적으로 나오면서 집에서 미드 전 시즌을 정주행 할 때보다 더 짜릿할 것이라는 걸 나는 안다. 나는 그런 사람이라는 걸 아는 게 나에게는 큰 발견이었다.
원피스는 나에게 그저 재미있는 인기 만화에만 그치지 않는다. 내가 꿈꾸던 삶, 나의 진정한 본능을 깨우는 역할을 한 부싯돌이었다. 그걸 알게 된 이후로 나는 혼자서 모든 걸 하고 싶어 했던 과거의 나를 지웠다. 혼자서 모든 걸 할 수도 없을 뿐더러 할 수 있어도 즐겁지 않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사람만 모아서는 안된다. 내가 일단 뭔가가 되어야 한다. 내가 내 분야에서 최고가 되어야지 최고와 일할 수 있다. 최고까지는 아니더라도 뭐든 하고 있는 걸 드러내야 한다. 하지만 그게 쉽지 않은 이유는 우리는 자기가 뭘 하고 싶은지 모르는 어른들로 가득 차 있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것만으로도 행복한 것이다. 하지만 모르는 사람이라고 삶이 끝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우리는 더 많은 시도와 실패를 해낼 의무가 있다. 내가 무엇을 즐기는지, 어떤 것을 했을 때 짜릿한지, 무엇이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지 등 수많은 질문의 답을 알 필요가 있다.
그래야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고 잘못된 길로 가더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걸 책과 사람과 이야기 속에서 알게 되었다.
<매스미디어 키드, 진정한 본능에 눈을 뜨다> 중 일부 편집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