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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냥갑 Nov 15. 2020

육아서 끊으시고 이 책 읽으시죠

육아서의 늪에서 빠져나오는 법

우리나라는 교육열이 높은 만큼 부작용도 심한 나라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장단점이 존재하는 만큼 나는 긍정적인 부분에 관심을 가져보고자 한다. 관심조차 없는 이들에게 관심을 불어넣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이미 엄청난 관심이 쏠려 있는 분야에 대한 좋은 정보와 제대로된 해결책이 만들어진다면 그것만큼 좋은 건 없을테니 말이다.


나는 만 두돌과 5살인 어린 딸 아이 둘을 키우고 있지만 육아서를 잘 보지 않는다. 대충 어떤 흐름이 있는지 임신했을 때 큰 흐름을 본 이후로는 찾아보려는 마음이 사라진지 오래다. 육아서적에 대한 관심에 대해 깊이 들여다보면, 부모님들의 관심사는 결국 돈이다. 아이가 좋은 대학(교육)을 나왔으면 좋겠으니까 영어 교육법이나 독서법에 못맨다. 취직 잘되거나 뛰어난 기업가로 성장했으면 좋겠다던가, 창의성을 키워주고 싶으니 여러 놀이법에 대한 것에도 관심을 가진다. 유대인의 교육법이나 경제관념에 대한 것도 그렇고 의사소통이나 리더십, 자립심, 회복 탄력성 등도 빠질 수는 없다.


하지만 결국 수많은 전문가들이 아이교육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그런 정보에 휘둘리는 부모님들의 걱정이 사라질 일은 희박하다. 나는 그 답이 육아서의 늪에서 빠져나오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육아서없이 나만의 가치관을 만들어가며 수월하게 육아를 하던 나에게 부모님뿐만이 아니라 학생, 교사, 직장인, 자영업자(결국 전국민이 봐야한다는 얘기)분들이 필수적으로 봐야 할 책을 알게 되었다.


바로 ‘평균의 종말’이다. 이 책과 세트로 이어지는 ‘다크호스’에 대해서도 엄청난 팬심을 가지고 주위에 추천을 하고 있었다.


“육아서 그만 끊으시고 <평균의 종말>이랑 <다크호스>읽어보세요. 생각의 확장을 경험하게 됩니다. 육아에 대한 조바심이 사라져요.”


그런데 추가로 또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은 책을 알게 되었다.


인발 아리엘리가 쓴 <후츠파: 창조와 혁신은 어디서 만들어지는가>다.


우리는 유대인의 교육법에만 관심을 가졌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진 적이 없다는 걸 이번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리고 <후츠파>야 말로 교육 걱정을 하는 부모뿐만이 아니라 성인인 우리들이 읽어야 할 책이라는 걸 말이다.


1. 일본 어린이집에서의 경험 vs 후츠파


2. 장난감, 놀이터, 아이


3. 교육 사업, 육아용품 시장, 엄마가 가져야 할 경제관념, 여성들의 경력


이 책의 초반을 읽으면서 위의 3가지 개요가 떠올랐다. 한 챕터만 읽었는데 이런 것들이 떠오른다는 건 할 얘기가 많은 책, 즉 적용할 게 많은 책이라는 뜻이다. 독서는 모르는 걸 알아가는 게 목적이 아니다. 적용할 점을 찾고 실제 생활을 변화시킬 수 있게 행동해야 독서의 본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책은 많이 읽고 있는데도 삶이 전혀 변하지 않는다거나, 헛똑똑이가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은 한 챕터만이라도 읽고 글을 반드시(!) 써보면서 자신의 삶과 어떤 적용점이 있는지, 어떤 변화를 꾀할 수 있는지부터 생각해보는 걸 추천한다.


안그러면 책만 읽으면서 그럴싸한 말만 많아지는 키보드 워리어가 된다. 앞으로의 세상은 그런 사람들이 무용인간이 될 일만 남았다. 소비(책만 읽거나, 영상만 보면서 새로운 정보만 흡수하는)만 하는 사람이 아닌, 생산을 하는 사람만이 살아남는다.


그럼 내가 ‘후츠파’를 읽으면서 이야기하고 싶었던 내용 중 하나였던 첫번째 <일본 어린이집에서의 경험>에 대해서 풀어보려고 한다.


일본 어린이집에서의 기억 = 토끼?

내가 일본 도쿄에서 살았던 것은 20년도 훨씬 이전의 일이다. 일본에서 7년간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기억에 남았던 것은 어린이집과 방과후교실이었다.


사진을 찾아보는데 이사 준비가 한창이라서 찾지 못해 아쉬울 따름이다. 이사를 간다음에 사진첩을 찾게 되면 그때가서 다시 사진을 공유해보려고 한다.


내가 다닌 어린이집에서는 토끼를 키우고 있었고 그 토끼를 돌보는 건 6~7살 어린이들이었던 우리들의 몫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어린이집만 그랬던 건지 아니면 일본 어린이집들이 전반적으로 그런 식으로 운영이 되었던건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토끼 우리 청소는 물론이고 토끼를 어린이집 놀이터에 풀어놓으면(?) 토끼가 실컷 놀고 난다음에 잡으러가는 것도 우리 몫이었다. 그 당시 우리 반에서 가장 키가 큰 친구가 토끼를 가장 잘 잡았었는데 겁이 많았던 다른 아이들은 그저 그 친구를 위해 토끼를 구석으로 몰아가는 역할을 했던 걸로 기억한다. 토끼를 잡을 때면 토끼가 발버둥을 치니 발톱에 긁히기 일쑤였다. 그래서 나 역시 겁이 났었는데 키가 큰 친구가 토끼를 용감하게 들어올릴 때면 그 친구가 중학생 언니처럼 보였을 정도였다.


지금 어린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 그 상황을 상상해보면 아이들이 토끼때문에 다치면 어떻게할까하는 걱정은 든다. 하지만 어린이였던 과거의 나를 떠올려보면 그런 상처 한 두개도 좋은 경험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코를 찌르던 토끼 소변 냄새가 아직도 기억이 난다. 만지고 쓰다듬을 때는 귀엽지만, 토끼 우리 청소 당번이었던 날은 그다지 반갑지 않았던 것도 기억이 난다. 그렇게 아이들은 책임감에 대해 배운다.


‘후츠파’ 속 쓰레기장 놀이터 이야기를 보며 나는 나의 어린시절을 떠올렸다. 그리고 지금 어린이를 위한 장난감과 놀이터에 위화감을 느낀다. 편해문 작가는 우리나라의 놀이터 디자이너이자 비평가, 놀이 운동가이다. 그는 아이들이 도전과 위험을 즐기며 마음껏 뛰어놀 것을 권한다. 그리고 아이들도 다쳐 멍들 권리가 있다고까지 말한다. 요새 놀이터는 색감이 너무 알록달록해서 재질과 색감이 일치하지 않는다. 재질은 철인데 아이들을 위한답시고 강철임을 드러내지 않으려 페인트를 칠한다. 심지어 안전을 위해서 지루할 정도로 따분하고 안전한 놀이터가 여기저기 만들어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기본적인 규칙은 명확히 알려주되, 이 규칙만 지킨다면 얼마든지 자유롭게 놀아도 좋다.(...) 구조물에 오르기 전에는 혹시 무너지지 않을지 확실히 확인해라. 돌아가는 바퀴 아래에 작은 물건을 끼워 넣어 움직이지 않도록 해라. 밧줄은 한 명의 허리에만 묶어라. 사람이 있는 공간에 물건을 던져서는 안된다. 이런 안전지침은 아이들의 행동을 제한하지 않으면서 주의력을 길러 준다. - <후츠파> p. 39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이 안전하고 실패없는 세상에서 컸으면 하고 감시하고 신경쓴다. 그런데 그런 게 과연 아이들을 위한 걸까. 단지 어른이 안심하고 싶어서인건 아닐까?


선생님이 없는 방과후 교실

아직 우리집 아이들이 어린데도 내가 초등학교 방과후 교실에 대해 관심이 많은 것도, 나의 일본에서의 경험때문이다. 일본에서는 1학년부터 3학년 아이까지만 다닐 수 있는(그 위의 학년 아이들은 OB로 졸업생들이라고 표현한다) 방과후 센터가 있다. 그 센터 이름은 ‘가쿠도우 클럽’으로 학교의 ‘학’, 아동의 ‘동’으로 학동 클럽이라는 의미이다. 학교가 끝나면 나는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서 센터로 걸어갔다. 데려다주는 어른도 없이 우리들끼리 2키로 이상의 거리를 걸어갔던 걸 기억한다. 그리고 센터로 도착하면 거기에는 어른이 존재한다. 하지만 있는 듯 없는 듯하다. 우리는 그 분들을 친구처럼 대하고 별명으로 부른다. ‘이시상, 야마상’ 이렇게 불렀었다. 성이 이시OO인 선생님과 야마OO인 선생님이라 그렇게 부른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선생님들의 풀네임을 아직까지도 모른다. 어쨌든 우리는 그 분들과 같이 놀지도 않는다. 가끔 그림을 그려달라거나 뭔가 궁금한게 있을때 물어볼 뿐 방과후 센터는 어린이들만의 공간이다.


우리는 그 곳에서 만화책을 읽었고 한발 자전거를 처음 배웠었고(나는 지금도 엄청 잘탄다!) 이야기를 지어내거나 트럼폴린이나 피구 등을 실내에서 하며 논다. 그렇게 우리는 그저 놀기만 한다. 매일 노는 주제도 다르다. 아이들이 정한다. 가끔씩 한달에 한번씩 전통놀이 대회같은게 열리면 그걸 위한 그림그리기나 토너먼트가 시작된다. 그 정도만 이시상, 야마상 등의 어른들이 주최하고 거의 모든 건 어린이들 위주다.


그 당시 기억을 떠올려보면 정말 하나하나 소중하다. 그때의 경험이 나에게 많은 걸 안겨주었다. 그래서 아직도 그 때가 그립기도 하다. 그리고 한국 아이들은 그런 순전히 놀기만 할 수 있는 시간이 없다는 게 안타깝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후츠파’를 읽으며 일본 아이들이 그런 경험을 통해 이스라엘 아이들처럼 기업가 정신을 가질 수 있었냐고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은 듯 하다. 하지만 그런 시간들이 적어도 나에게는 너무나도 큰 경험이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한국에서의 교육, 안전 위주의 방향성이 우리 아이들을 더욱 실패를 두려워하는 쪽으로 굳히게 만들고 있진 않은지 걱정도 된다.


하지만 이렇게 ‘후츠파’라는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된 이상, 우리도 변화를 꾀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후츠파 정신뿐만이 아니라 맨 마지막 저자의 감사의 말에 등장한 멋진 단어 ‘피르군’을 소개하며 이만 글을 마쳐볼까 한다.


피르군은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그 자체만을 목적으로 다른 사람의 즐거운 경험에 참여해 순수하게 공감하는 행동을 의미한다. 피르군을 행하는 사람은 질투심과 이기심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이 이룬 성과와 업적을 마치 내 일처럼 기뻐한다. 자신의 노력으로 타인을 기쁘게 한다는 점에서 피르군과 칭찬은 다르다. 피르군은 칭찬보다 훨씬 강력하다. - ‘후츠파’ p. 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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