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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냥갑 Apr 05. 2016

내가 모르는 중국

아버지를 온전히 이해하기

내가 아버지와의 논쟁에서 간격을 좁힐 수 없었던 이유는 아버지가 겪어온 환경에 대한 무지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중학교 2학년 때 1966년 중국의 문화혁명을 겪으셨다.


1966년 8월 톈안먼[天安門] 광장에서 백만인 집회가 열렸고, 이곳에 모인 홍위병()들은 전국의 주요 도시에 진출하였다. 그래서 마오쩌둥 사상 찬양하고 낡은 문화를 일소하기 위하여 대대적인 시위를 전개하였다. 학교를 폐쇄하고 모든 전통적인 가치와 부르주아적인 것을 공격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문화 대혁명 [文化大革命] (출처:두산백과)


사실 이렇게 백과사전 출처로 딱딱한 정보를 읽고 있으면 별 느낌이 와 닿지도 않고 재미없던 국사나 세계사 공부하던 학생 때 생각이 나지만, 이 사건이 나와 가까운 사람이 경험한 일이라고 하면 얘기는 달라진다.

학교를 폐쇄하고...

실제로 아버지와 어머니는 중학교 2학년 때까지 학교를 다니고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수 없었다.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갑자기 멀쩡히 다니던 학교가 내일부터는 '문화혁명'때문에 폐쇄된다니... 그때 중학교 2학년생이던 아버지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분했을까? 얼떨떨했을까? 학교를 안가 신났을까? 모두가 그런 상황이었으니 자연스레 받아들이고 해야 할 일을 했을까?


아버지께 영상 통화를 걸어 물어봤다.

그랬더니 그 당시에는 모두가 혁명에 따라야 되는 것이라고, 당연히 그래야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우리는 상상도 못할 것이라고 했다.

더 깊은 얘기를 하고 싶었지만 두 분은 동아줄로 사다리를 만드는 중이라며 내 질문에 그다지 귀 기울여 주지 않으셨다. 나의 첫 번째 대화 시도는 이렇게 실패했다. 내가 타이밍을 못 맞춘 것도 있지만 항상 아버지는 바쁘시다. 퇴직하기 전에도 논문을 써야 한다며 바쁘다고 하셨고, 퇴직 후에는 반년은 중국 선전에서 반년은 한국 남해에서 강태공과 같은 생활을 하느라 바쁘다. 여러모로 바쁘신 분이다. 함께 살 때도 멀쩡한 가구들을 늦은 밤에 이리 옮기고 저리 옮기고 하시던 분이니 뭐 갑자기 이상하게 느껴지진 않지만 말이다.


어쩌면 당신의 인생을 사느라 바쁘신 아버지가 나은 걸지도 모른다. 퇴직 후 자식들 참견하고 심심해하시는 것보다 자식들 입장에서는 한결 편하니까. 아버지의 그런 생활을 보고 자란 나 역시 나 자신이 행복해야 가족 모두가 행복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내 아이들에게 이래저래 참견하고 내가 못다 이룬 꿈을 이루게끔 꿈을 자식에게 밀어붙이는 숨 막힌 부모가 아니라, 부모 스스로도 하고 싶은 건 해내고야 마는 그런 삶. 그런 면에 있어서 어릴 적에 거의 방임에 가까운 교육으로 부모님께 서운했던 감정이 현재는 감사함으로 바뀌었다. 감사하다는 마음을 먹기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말이다. 


문화혁명 시작으로부터 10년 후인 1976년 마오가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가 대학을 들어가기 위해 시험을 친 것은 학교가 폐쇄된 중2 시절로부터 15년 뒤였다. 그 사이 군대에서 5년간 시간을 보내고 제대 후에는 농민으로서 공동농장에서 일을 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29세에 아버지는 독학으로 북경대 경제학과에 합격을 했다.

십여 년간 학교를 못 다닌 상태였다가 북경대에 합격했다는 것 자체에서 인간극장이나 나와는 먼 자기계발서 느낌이 나는 성공담이라 내가 더 아버지와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다. 자수성가한 고지식한 아버지와의 대화가 쉬울 리 없다. 뭘 해도 나는 아버지 이상의 노력을 하지 않은 것으로 치부될 것이다. 나는 북경대라는 벽에서 이미 쫄아버린 건지도 모른다. 내가 그 상황이었으면 북경대에 합격할 수 있었을까. 자신이 없었다. 나는 무엇을 해내야 아버지를 뛰어넘은 게 될까.


아버지를 뛰어넘는 게 그리 중요한 건가 싶지만 그래야만 아버지가 인정해줄 것이라는 이상한 마음이 자식들에게는 있는 듯하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 잘했다는 한 마디면 될까? 아니면 눈물을 흘리면서 좋아하시는 걸 보면 인정받은 걸까. 그 기준조차 애매한 골대를 향해 점프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내가 중국에 대해 알게 되면 아버지를 이해하게 될까. 아버지는 항상 중국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한국인이 거의 없다는 말씀을 하셨다. 나도 어쩌면 그런 사람 중 한 사람일 것이다. 부모님의 모국은 중국이지만, 나는 중국에서 실질적으로 생활한 기간이 다 합쳐봐도 2년이 채 되지 않는다. 아버지와의 대화만으로 이 커다란 벽을 넘을 수 있을까. 아버지를 온전히 이해하고자 이 연재를 시작했지만, 오늘 바쁘다며 끊긴 전화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대화할 기회조차 만들기 쉽지 않겠다는 조바심이 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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