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이커가 있어야만 실험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초등학생 때 방학숙제로 과학실험이 있었다. 그 당시 나는 결과도 대충이 예상이 가고 별로 손이 가지 않은 실험을 해서 제출했었다. 말꺼내기도 민망하지만, 콩을 소금물과 설탕물과 일반 물에 각각 적신 솜에서 키우는 매우 따분한 실험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굉장히 후회가 되고 지금이라면 어떤 실험을 했어야했던걸까 고민이 아직도 될 정도다. 이처럼 실험하면 뭔가 과학자만이 할 수 있거나 아예 관련이 없는 사람에게는 따분한 분야로 전락하기 쉽다. 하지만 지금 우리 세상은 크고 작은 실험을 누구나 할 수 있는 거대한 판이 벌어진 상태다.
그 이유를 <실험의 힘>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1) 기록의 디지털화와 온라인 플랫폼의 지속적인 확대로 예전보다 훨씬 많은 데이터를 이용할 수 있게 됐다. 2) 온라인 플랫폼 덕분에 무작위 추출이 더 쉬워졌고 비용도 줄었다. 테크 기업은 대조군(통제집단)을 두는 게 표준적인 운행 방식이다. 3) 행동과학적 연구의 결과로, 지극히 작은 변화가 의사결정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고, 인간의 직관에는 많은 결함이 있다는 게 밝혀졌다. 따라서 실험을 통해, 직관이 증거로 보완될 수 있다. - p. 281 <실험의 힘> 마이클 루카, 맥스 베이저만
실험을 단순히 비이커가 필요하고 어떤 과학 기구가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좁은 의미에서, 사회적 실험이라는 거대한 의미로 옮겨와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나에게 최근 알게 된 놀라운 실험은 바로 ‘EU’의 실험이다.
나에게 브렉시트도 EU의 존재도 나와는 그다지 관계없는 먼 나라 이야기로 느껴졌다. 그저 지식인이라면 알아야한다는 건 알겠는데 부끄럽지만 세계사에 관심이 없던 공대생이었던 나는 일상에 치여 세계사를 더 깊이 파보려고 하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한 유튜버의 EU관련 영상을 보게 되었다. 그는 350만 명이상 구독자가 있는 일본 개그맨이다. 강의 형식으로 세계사부터 문학, 현대 상식 등 폭넓은 내용을 다루는 교육계 유튜버다. 너무나도 다양한 주제를 책을 읽고 소개해주는 그의 영상을 보며 나도 어렵게만 느껴졌던 세계사나 일본 문학, 국제 정세에 관심이 많아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EU가 거대한 인류 실험의 하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EU가 처음 만들어진 계기는 1차,2차 세계대전을 경험한 유럽이 이제 더 이상 제2의 나치가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출범했다고 볼 수 있다. 처음 시작은 유럽석탄강철공동체를 거쳐 경제, 원자력 공동체, 그리고 지금의 유럽 연합인 EU가 되었다. EU의 첫 시작이 독일이 더 이상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게끔 막는 것이다보니 무기 제작의 원료라고 할 수 있는 석탄강철에 관한 규제가 중요했다. 그런 흐름을 알게 되면 EU가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하는지, 우리가 국제 정세를 이해하는데에도 큰 도움이 된다.
EU가 만들어지고 하게 된 대표적인 활동이 자유이동을 위한 쉥겐 조약과 유로로 통화를 통일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영국은 이 두가지를 거부한 상태에서 EU에 소속되어 있었으니 여기까지만 봐도 브렉시트의 전조를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대학생 때 친구들과 한달간 유럽 여행을 하면서 나는 비자가 필요했기에 쉥겐 비자라는 것도 그 때 처음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게 여기서 나온 건지조차 이해 못하고 나는 코찔찔 흘리며 부모님 돈으로 탱자탱자 유럽 여행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알고 있던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더 많은 게 보였을 텐데 참 아쉽다.
자유이동을 위한 쉥겐 조약과 유로 통화로 통일한 게 후에 또 2가지 문제를 만들었다. 바로 그리스 위기와 난민 문제였다. 그리스의 방만한 재정 관리로 그리스는 큰 타격을 받았지만 그걸 해결하기 위해 금융정책에 손댈 수도 없었다. 바로 통합된 유로때문이었다. 일본이 엔화를 풀고 말고에는 일본 정부가 스스로 결정내릴 수 있다. 하지만 그리스는 EU와 한몸이라 그렇게 할수도 없고 EU로부터 압박을 받게 된다.
중동과도 연결되는 난민 문제 역시 그렇다. 쉥겐 조약에 의해 이동이 자유롭다보니 EU 중에 한 나라에만 들어가도 복지가 가장 좋은 독일로 바로 들어갈 수 있다. 한 나라가 포용할 수 있는 난민의 규모는 제한되어있다. 그렇기에 이런 국제 정세가 서부 국가의 문제로만 그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한다.
이런 문제들이 복잡하게 얽히면서 영국에서는 브렉시트, 터키는 EU에 계속 가입하고 싶어했지만 거절당한 문제, 그리고 독일 내에서의 문제 등이 한꺼번에 보이게 되었다. 결국 종교와 민족에 대한 문제로 인해 모두가 자국제일주의로 치닫고 있는 상황이란 얘기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트럼프 당선이었다. 모두가 충격을 받았고 믿을 수 없는 상황이라고 했지만 사실 전세계는 곪아가고 있었고 그게 그대로 표면에 드러난 것에 불과했다. EU가 실행했던 인류의 거대한 실험은 지금 실패로 가는 길목에 있는 걸까?
전세계에서 트럼프가 재당선될지 여부를 알기 위해 파견된 세계 특파원 중에 일본의 비율이 가장 높았다고 한다. 나 역시 그 당시 일본이 트럼프에 대해 분석하는 기사 등이 우리나라보다 많은 것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했었는데 그게 다 미국과의 관계에서 큰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일본이라서 그랬던 것이다. 그만큼 일본은 미국의 행보에 대해 크게 주목하고 대책을 세우려고 하는데 우리나라는 어떤가. 옆 나라 일본의 정치에 대해서도 그다지 관심이 없다.
내 삶을 살아가는데에도 벅차다보니 중동 문제에 대해 막연하게만 생각하고 큰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 이번 기회에 큰 충격을 받았다. 세계사, 종교, 국제 정세에 누구보다도 관심을 가져야겠다고 마음먹게 되었다. 그리고 이 분열된 세계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실험들은 없을까를 고민하게 되었다.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실험은 나라는 몸뚱아리(?)의 잠재력을 최대한 뽑아낼 수 있는 것인가에 집중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나는 모든 방법을 총동원해서 어떻게든 내가 할 수 있는 효율의 최대치를 끌어올리기 위해 이리저리 실험을 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내가 성장형 사고 방식의 사람들과의 시너지를 누구보다도 꿈꾸고 있는만큼 작은 온라인 모임인 <언어씹어먹기>라는 모임을 만들어 1년 넘게 사람들과 함께 으쌰으쌰하고 서로 격려하고 있다. 이것들을 하면서 내가 알게 된 것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사람들은 그다지 자신의 잠재력을 믿지 않는다는 점이었고, 그와 동시에 실행력과 지식의 사이에는 정말 요단강과도 같은 넓고 건너기 힘든 거리감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사람들이 그걸 좀 더 쉽게 넘어가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게 쉽지 않음을 알게 된 나는 나의 에너지를 최소한으로 쓰면서 아주 작은 실험들을 지금도 아주 조금씩 추가해서 하고 있다. 사실 내 능력부족이 더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로 인해 나의 성장에 더 집중하게 되었으니 어쩌면 내가 해왔던 그 모든 실패와 성공들 모두 나에게 긍정적인 효과를 준 것만은 확실하다.
다양한 인터넷 플랫폼이 생기고 있고 우리의 시간을 빼앗아가는 유혹도 점차 많아지고 있다. 우리가 이 거대한 실험의 장에서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것은 작은 실행의 힘을 몸소 체험하는 게 아닐까 싶다. 블로그, 인스타, 페북에서도 누구나 시작해볼 수 있다. 그리고 그 경험으로 인한 인사이트를 공유할 수도 있는 세상이다.
나는 이번 기회에 내가 몰랐던 큰 숲에 대해 좀더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을 더 많이 벌어보려고 한다. 더 많은 정보가 쏟아져오고 있는만큼 그 정보를 가려낼 줄 아는 힘의 중요성은 높아질 수 밖에 없다. 이제 더욱더 분열되는 세계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지 제대로 아는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걸 기억해야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