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연 어머님이 일기를 쓰기 시작한 지는 2년이 훨씬 넘은 것 같습니다. 제가 수업 중에 어르신들께 숙제로 일기를 쓰게 했는데,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바뀌자 대부분의 어르신 들은 일기 쓰기를 그만두셨어요. 이유를 물어보니 쓸 게 없다고 하는 분이 많았고, 몇 분은 개인적인 글을 더는 보여주기 힘들다 하셨고, 또 몇 분은 선생님을 힘들게 하는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강요할 수 없어서 더 이상 권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딱 한 분, 갑연 어머님은 하루도 일기 쓰기를 거르지 않고 꼬박 써 오셨어요. 제가 힘들어할까 봐 그러시는지 글을 길게 쓰지는 않고 다섯, 여섯 문장 정도 길이였지요. 일주일에 두 번 수업을 하는데 수업이 있는 날마다 며칠 동안 쓴 일기를 봐줘야 합니다. 그게 또 미안하신지 수업이 끝나고 뒷정리를 하는 저에게 가방에서 빵이나 우유 같은 요깃거리를 슬그머니 꺼내 주십니다. 저는 거절하기도 어렵지만 싫지도 않은 감정이 교차하는 것을 느끼며 ’넙죽‘ 받아서 그 자리에서 맛나게 먹곤 합니다. 그래서인지 어머님께 항상 빚진 마음이 있고 감사한 마음이 차오르곤 합니다.
1937년 2월생, 올해 88세. 경남 합천에서 갑연 어머님은 셋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아들을 바라던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셋째 딸이라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을 품고 살았다고 했습니다. 학교에 보내주지 않아도 부모님을 원망할 줄 몰랐다고 합니다. 결혼해서 아이들을 키우며 어깨너머로 글을 깨우쳤고, 덧셈, 뺄셈도 그때 겨우 알게 되었답니다. 아이들이 다 말썽 없이 착하게 자랐다 조곤조곤 말씀하시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자식들이 모두 어머님을 사랑하는 모습이 일기 글 곳곳에서 느껴졌습니다.
코로나 19로 집에만 지내는 어머님을 안타깝게 생각하던 둘째 며느리가 수소문해서 복지관 ’한글 교실‘에 오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줄 공책으로 된 제법 두께가 있는 일기장이 벌써 세 권이나 쌓였습니다. 어머님께 일기장을 잘 보관해 두시라고 신신당부를 해두었습니다. 어머님은 그깟 일기를 뭐 하려고 그러냐고 하시지만, 내색은 하지 않지만 저의 말에 기분이 좋으신 것 같았습니다. 제 마음 한 켠에서는, 기회가 된다면, 책으로 엮어서 선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저는 어쩐 일인지 갑연 어머님의 글이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처럼 귀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어머님은 배움에 대한 열정이 대단합니다. 그 연세에도 몰랐던 문법 규칙을 새롭게 깨닫고 실력이 점점 늘어가는 모습이 눈에 보입니다. 예를 들어, ‘왜냐하면’으로 시작하는 문장을 ‘때문이다’로 끝내는 논리적 호응 관계를 갖추어 글쓰기를 하도록 지도했더니, 처음엔 ‘왜냐하면 배가 고파서 때문이다’라고 썼어요. 제가 ‘어색하다’고 하자 ‘아하!’ 하며 곧바로 ‘왜냐하면 배가 고팠기 때문이다’로 고치시는 거예요. 이런 성장은 나이가 많은 분에게는 개미가 하루아침에 태산을 정복하는 것만큼이나 놀라운 일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글솜씨도 아주 좋아요. 몇 줄 안 되는 일기이지만 시작과 끝이 명확하고, 내용도 알차게 구성할 줄 압니다. 하루 동안 일어난 일 가운데 인상적인 일을 뽑아내 군더더기 없이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솜씨가 뛰어납니다. 제가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를 떠올리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갑연 어머님의 삶 자체가 단정하고 깊이가 있어서 그렇다는 것을 저는 압니다. 사실은 제가 어머님의 글을 통해 배우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얼마 전, 수업 중에 여행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어머님은 “이제 어디 가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내색하지 않는다.”라고 하셨어요. 제가 “거동이 불편하기 전에 많이 다니셔야 한다.”라고 말씀드리자, “이제는 걸음도 느리고 힘이 없어서, 자식들이 나 때문에 마음껏 놀지 못할까 봐 가고 싶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자식들이 그런 속마음을 알면 마음 아파할까 봐 일부러 ‘가기 싫다’고 말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는데,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꾹 눌러 참아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가기 싫다’고 말하는 그 마음이 제 마음속 깊이 와닿았습니다, 저는 그날 사랑이 그렇게 조용하고 깊게 표현될 수 있음을 처음 알았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늙는다는 건, 그런 사랑이 가능해진다는 뜻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어머님을 오래도록 만나고 싶습니다.
※ 갑연 어머님(가명)은 실제 인물을 바탕으로 한 분으로, 사생활 보호를 위해 이름과 일부 세부 사항을 변경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