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반영 Mar 04. 2017

나이가 든다는 건

어느덧 박사 과정 3년 차가 끝나간다. 눈 앞에 닥친 온 갖가지 데드라인에 허덕이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은 별반 달라진 것이 없지만, 그래도 도망가지 않고 참고 견딘 덕에 코스웍도 끝나고 이제 졸업시험을 포함해 논문에 매진하는 일만 남겨두고 있다. 중간에 논문 주제며 연구 방법론도 바꾸고, 심지어 지도교수에 랩까지 옮긴 터라 그래도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성과라 자위한다. 


사실 오래도록 학업을 이어가며 나는 시간의 흐름에 꽤나 둔감해졌다. 3월이면 새 학년이 되던 한국의 학제와는 전혀 다른 곳에서, 그것도 1년의 절반이 겨울인 낯선 땅에 살며, 내가 헤아린 것이라곤 오로지 과제 제출까지 남은 시간과 페이퍼를 채우기 위한 글자 수가 전부였다. 마치 무엇을 헤아리고 산 적이나 있었냐는 듯, 그저 달력에 빼곡히 적어놓은 해야 할 일의 목록만이 내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누구인지 말해주는 것 같았다. 시간은 사라지고 오직 공간으로서만 존재하는 그런 느낌... 



익숙한 공간에서 벗어나 새로운 곳에 갈 때면 그동안 흐르지 않던 시간이 한꺼번에, 그것도 아주 빠른 속도로 나를 통과하는 듯한 착각에 휩싸인다. 30년을 넘게 살던, 그러나 지금은 그 어떤 공간보다 낯설어진 한국땅을 밟을 때에도 그렇고, 특히나 결혼 전에 쓰던 가구마저 그대로인 일산 친정집에 들어설 때는 더욱 그렇다. 서로 마주하지 않고 살아온 시간들이, 마주하는 순간, 빛보다 더 빠른 속도로 흘러 버리니 말이다. 마주한다는 것에서, 서로를 부둥켜안을 수 있다는 것에서, 각자의 짐을 짊어지고 사느라 고생했노라 건네는 두드림 가운데 놓으래야 놓을 수 없던 끈끈한 연대감의 온기가 온몸을 전류처럼 구석구석 휘감는다. 그리고 나는 그간 학업을 핑계 삼아 유예시켜 놓았던 모든 역할들을 세포 하나하나에 새기며, 그렇게 시간을 덧입는다. 나이에 걸맞은 내가 되자. 철 좀 들자. 하면서. 



늘 공부하던 연구실을 떠나 어린아이부터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로 꽉 찬 집 근처 도서관을 방문할 때도 가끔은 그렇다. 생경한 그 느낌이 때로는 그 어떤 자극제보다 강력한 역할을 하기에 계속해서 낯선 어딘가로 가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특히 며칠 전에는 한국 여대생처럼 보이는 사람을 만나며 또다시 그 생경함에 사로잡혔다. 워낙에 다양한 인종이 섞여 사는 도시이지만, 동네에서 한국 사람을 만나는 것은 결코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다. 피부가 검든 하얗든, 머리가 노랗든 빨갛든, 그저 내게는 하나의 배경이었다. 그 어떤 것도 전경으로 튀어나오는 부분이 없어 내 인생조차도 그저 그렇고 그런 배경 속에 묻힐 판이었거늘. 



물건은 있지만 사람은 없는 그 자리가 유독 마음에 들었다. 오랜 시간 자리를 비워두면 도서관 직원이 물품은 따로 보관하고 다른 사람들이 자리를 쓸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던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자리를 옮길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렇게 1시간 가까이 지나 한국 여대생 같은 분위기의 아이(?)가 와서 자리에 앉았다. 자리를 정돈하기에 이제 갈 채비를 하는구나 싶었는데 그대로 책상에 엎드려 잠을 자기 시작한다. 도서관에서 잔다는 것은 여기에선 좀처럼 보기 드문 광경이기에 저절로 눈이 갔다. 아니나 다를까, 돌아다니던 직원이 와서 싱긋 웃더니 책상을 똑똑 두들겨 단잠을 깨운다. 무안해진 여학생은, 뭐랄까, 그래. 좀 새초롬한 표정을 지었던 것 같다. 


나도 따라서 조금 웃었다. 나보다 최소 12살은 어릴 것 같은 그 좋은 나이에, 감성 충만한 이 도시에서, 자유롭게 자기 자신을 탐험하지 못하고 그저 영어 공부의 압박 속에 책상을 지켜야만 할 것 같은 그 묘한 끌림을, 나는 어쩐지 알 것 같았다. 나의 청춘은 설익은 어른 행세를 하느라 그런 압박감에서 조금은 자유로웠을지 모르나, 그때 채우지 못한 것들이 미해결 과제로 남아 이렇게 너와 같은 시간에, 같은 공간을 유영하고 있으니, 나의 시선을 너무 따갑지 않게 받아주었으면 좋겠다, 고 바랐다. 


모든 것이 배경뿐이던 곳에서 전경이 하나 튀어 오르던 그 순간, 나는 시간을 입고 '나이'라는 것을 헤아렸다. 서른여섯. 조그맣게 읊조리려다 결국 입 밖으로 툭, 튀어나왔던 것 같다. 어차피 아무도 알아듣지 못할 거라 생각하니 이런 것도 무슨 언어라고, 하는 마음이 일었다. 언어는 고사하고 숫자조차 아니구나 싶기도 했다. 아무런 울림 없이 어딘가로 튕겨졌을 소리. 나이라는 것 자체가 순간의 알아차림 후엔 어딘가로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내가 언제 서른여섯이나 먹었나. 많지도, 그렇다고 적지도 않은 이 숫자 앞에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다시 책으로 눈을 돌리는 것뿐이었다. 


나이가 든다는 건, 오로지 그것을 알아차리는 순간에만 존재한다. 나이가 든다는 건, 시간의 흐름이 얼마나 빠른지 알아차리는 것과 동의어 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매 순간순간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지 그 가치와 의미를 저절로 깨닫는 것. 아마도 그런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미래의 어떤 순간에 또다시 들이닥칠 그 생경한 시간의 엄습을 위해 대비하는 수밖에 없다. 나의 지금 시간들이 설익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것, 지금 시기에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더 열심을 다해 즐기는 것, 그래서 감정의 찌꺼기들을 미해결 된 채로, 미래의 나에게 숙제로 남기지 않는 것. 이것이 청년의 때에 노년의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인 것 같다. 그리고 안다. 나이가 든다는 것, 그것은 이 모든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알아가는 것임을. 


2017년 3월 3일


 


작가의 이전글 소란한 보통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