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반영 Nov 15. 2016

소란한 보통날

하루를 조금 늦게 시작하고 싶던 일요일, 한참을 프린터와 씨름하며 마음이 점점 급박해져 이러다 정말 내가 미쳐버리는 건 아닐까 싶던 찰나, 눈을 떠보니 다행스럽게도 꿈이었다. 자세가 조금 불편하여 다시 바로 눕고, 긴 심호흡과 함께 팔을 뻗어 핸드폰 시계를 보니 오전 7시 25분. 아직 좀 더 잘 수 있다는 안도감은 꿈에서 마주한 장면이 반사적으로 뇌리를 스치며 사라졌다.


TA로 들어가는 수업은 보통 12시 30분에 시작한다. 시계를 보니 12시 20분. 부지런히 출발해도 제시간에 도착하기 어려울 것 같다. 황급히 집을 나서려는 찰나, 학생들이 볼 시험 문제 출력하는 것을 잊은 것이 떠오른다. 부랴부랴 노트북 전원을 켜고 프린터와 연결했다. 인쇄 버튼을 누르고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아 몇 번이고 같은 절차를 반복하며 최대한 빠르게 손과 두뇌를 움직여본다. 지각을 면하기 어렵다는 생각과 이미 수업 시작 시간이 지난 것을 확인한 순간부터는 온몸의 근육들도 긴장으로 굳어오는 것 같다. 같이 살고 있지도 않은 엄마가 마치 언제나 함께였다는 듯 아주 자연스레 부엌에 있길래 나 좀 학교까지 태워다 달라고 소리 질러 부탁했다. 자동차 열쇠를 들고 주변을 서성거리며 기다리는 엄마의 모습은 긴장감을 고조시킴과 동시에 묘한 안정감을 준다. 


보통 15분이 지나도록 강사가 오지 않으면 그 날 수업은 자동 취소가 되는 현실 세계의 규정은 꿈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12시 45분이 넘어가도록 시험지 출력은 하지 못했고, 나는 계속해서 학생들에게 어떤 변명을 늘어놓을지 되뇐다. 수업 시작 시간에서 멀어질수록 변명은 더욱 크고 무거워지기 마련이다. 지각 시간이 한 5분 내외로 예상되던 초반에는 그저 버스를 놓쳐서, 아니면 사실대로 집에서 사용하는 프린터에 문제가 있어서라고 말할 생각이었다. 그러다 예정된 수업 시작 시간보다 15분이 넘어가면서는 정말 위급하게 아픈 것처럼 연기를 할까 싶었고, 시간이 더 자나니 학생들이 가지 않고 나를 기다려줄지가 걱정되어 마음은 갑절로 초조해지고 말았다. 담당 교수님의 실망한 얼굴도 지나가고, 그간 학생들과 쌓아온 신뢰 관계가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지는구나 싶어 착잡하기로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머리털마저 쭈뼛 서버릴 것 같은 극도의 긴장감은 스트레스로 이어지며 마침내 모든 것을 포기해야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잠에서 깨어보니 오른쪽 볼을 깔고 엎드린 자세로 팔은 머리 뒤에서 깍지를 끼고 다리는 90도 각도로 세우고 있었다. 자세를 고쳐 눕고 다시 잠을 청했지만, 대체 내 인생에 뭐 그리 늦은 것이 있나 괜스레 억울한 마음이 밀려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다시 잠자는 것은 포기하고 또다시 바쁘고 빠르게 해야 할 일들의 리스트를 경중을 따져가며 점검했다. 잠을 자는 것도 아니고 마는 것도 아닌 상태로 누워 있는 것보다는 차라리 나았다. 이미 일요일 아침인데도 주말 동안 마쳐야 하는 것 중 제대로 끝난 것이 없어 자괴감이 일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을 헤아리며 지치지 말자, 포기하자 말자, 우울해하지 말자 스스로에게 속삭인다. 스스로에게 건네는 힘찬 응원이 되어주길 바랬던 말들은 주절거림 그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하는 듯했다.



지금 이대로 살아도 괜찮은 건지 묻고 싶었다. 곁에 있는 사람들과 소소한 행복을 누리며 그 안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며 사는 것. 그저 내가 사는 이유는 이것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러기엔 이미 가진 것이 너무 많아 보인다. 어디 그것뿐일까. 소유한 것들을 지키느라 안간힘을 쓰는 나의 심신은 또 얼마나 고단한가. 뭐 대단한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경제활동을 포기하며 유학길에 올랐는지 모르겠다, 모르겠다, 모르겠어. 그러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이런 고민 어디 하루 이틀 하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고민하며 사는 것 또한 인생에서 느낄 수 있는 한 가지 맛 (아마도 쓴 맛) 이겠거니 하며 그 무게를 덜어낸다. 


오늘도 그저 그런, 조금 소란했지만 아주 평범한, 보통날일 뿐이다. 


2016년 11월 13일 


덧. 에쿠니 가오리의 <소란한 보통날> 도서와는 전혀 무관한, 30대 유학생의 보통날들에 대해 적은 일상 이야기 매거진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