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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영 Sep 29. 2016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

사색이 주는 심리 치유의 효과

마음을 한 바탕 뒤집어 꺼내 구석구석 쌓인 먼지도 털어내고, 안전지대를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한 뾰족한 감정들은 다시 제자리를 찾아주고 싶은 그런 날이 있습니다. 무언가 어긋나기 시작한 느낌이 아무 때고 치솟는 까닭에 마음을 아무리 다잡아도 ‘그냥 이대로도 괜찮을까?’ 싶은, 두려움만 고조되는 그런 날 말입니다. 스스로에게 위로를 건넬 겨를도 없이 내 삶은 왜 이렇게 빡빡하기만 한 건지. 누구에게라도 따져 묻고 싶은 마음입니다.  


대체 우리 인생의 끝에는 얼마나 대단한 것이 있는 걸까요? 설령 그것이 제 아무리 대단하다고 한들, 지금-여기에서 마땅히 누려야 할 행복과 맞바꿀만한 가치가 있을까요? 나의 바쁨과 고됨으로 미처 돌보지 못한 소중한 이들을 향한 부채감은 그저 이렇게 물 흐르듯 보내 버려도 되는지, 소리 없는 죄책감이 마음을 짓누릅니다. 게다가, 오늘도 나는 최선을 다해 순간순간 열심히 살았건만, 하루의 끝에서 되짚어 본 시간들은 왜 이렇게 만족스럽지 않은 걸까요? 말 그대로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분주하게 움직였는데도, 여전히 나는 내 뜻대로 살고 싶은 자유를 갈망합니다. 


마음 한 켠에 자리한 내 뜻대로 살고픈 자유에 대한 욕망은 내 뜻대로 살지 못함을 보여주는 선택권 상실의 지표이자, 나의 일상이 지나치게 의무들로만 점철되고 있다는 이상 신호입니다. 태어나서 성인이 된 이후로 내가 선택해온 것들을 떠올려보면 얼마나 많은 선택이 나 자신이 아닌 것에서 비롯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대학 선택의 문제에서부터 직업과 직장, 결혼과 출산, 육아 등 인생 전반에 걸친 굵직굵직한 선택들이 ‘적령기’라 부르는 시기에 마무리되어야 할 과업처럼 여겨지는 상황에서 이미 우리는 제한된 선택지만을 갖게 되는 것이지요.


물론 그 선택이 우리를 언제나 인생 불만족의 길로 인도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끊임없이 경쟁하게 되는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 누구나가 비슷한 모양으로 상호 비교 하에 살며, 선택한 것에 대한 기쁨보다 선택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불안감을 더 크게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불안감으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해 더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을 선택하는지도 모릅니다. 결국 지금 이 선택이 좋고 최선이라기보다 선택하지 않았을 때 혼자서 외롭게 짊어져야 할 책임과 의무를 최대한 피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택을 하고서도 또다시 숱한 상품평을 검색하며 비슷한 의견을 가진 사람이 있는지 살피고, 나의 만족과 불만족을 판가름하기 위한 필요조건으로 타인의 눈과 촉감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일생일대의 중요한 선택을 앞두고 마음이 복닥거렸던 어느 날, 어렵게 틈을 내어 하얗게 쌓인 눈밭 산책길에 나선 적이 있습니다. 풍경을 즐기기엔 기온이 터무니없이 낮았던 터라, 그저 운동 삼아 공원이나 한 바퀴 돌고 오자는 심산이었지요. 사실, 녹음이 유난히 짙던 나무들이 빚어낸 풍경에 퍽이나 감동을 받았던지라, 겨울이 되어 앙상한 가지만 남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시리도록 푸르다는 말을 실감케 하는 하늘과 마른 가지들이 보내는 알 수 없는 경이로움에 순식간에 휩싸이며, 산책하는 내내 알 수 없는 충만함으로 마음이 따뜻해지기까지 했습니다.



돌아보니, 나에게 겨울은 그저 좋아하는 또 다른 계절을 ‘기다리는 시간’이었을 뿐, 자기만의 특색을 가진 한 계절로 오롯이 인식되지는 않은 듯했습니다. 기온이 포근해지기 시작하며 두터운 외투를 벗어던질 날을 기다리고, 하루라도 빨리 선선한 바람을 느끼기를 갈망했고, 쨍한 여름날의 야외 활동과 단풍이 노을과 어우러지며 만들어내는 풍광을 그리워했습니다. 하지만 아무 의미 없어 보이던 기다림의 계절이 안겨준 위로는 다른 계절이 지닌 아름다움에 견주지 못할 만큼 크고 단단한 무엇이었습니다. 


조그맣게 올라온 새싹을 머금었을 때나, 무성한 잎사귀 틈으로 잡을 수 없는 바람을 흘려보낼 때나, 취함과 잃음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그 어느 때고 나무가 나무이지 않은 순간이 없듯, 일방향으로만 흘러가는 내 인생 어딘가에서 고개들 돌린다는 것은, 그저 그곳에서 시작될 또 다른 계절과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종류의 행복을 만나는 경험일 거라는 생각이 마음을 가득 메웠습니다.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치자, 행복의 문 앞에 다다른 순간, 미처 들어가지 못한 다른 문에 대한 욕망과 집착으로 어느 곳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바보가 되지는 말자는 마음이 저절로 먹어졌습니다. 남은 일생을 좌우할 것만 같던 선택은 그저 지금까지 쌓아 올린 경력이 무용지물이 될지 모른다는 상실과 집착이 만들어낸 허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나’라는 존재가 한겨울의 나무처럼 헐벗었을 때, 아무것도 하지 않는 막연한 기다림의 시간 속에 있을 때 더욱 분명하게 다가왔습니다. 


사실 우리의 속을 끓이는 많은 문제는 돌고 돌아 다시 나로 돌아왔을 때에만 해결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나와 직면한 그 순간에 ‘아하!’하고 마음을 울리며 스르르 풀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보화 사회가 가속화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견뎌내기란 참으로 쉽지 않아 보입니다.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시간, 침대에 누워 잠들기를 기다리는 시간, 심지어 화장실에 있는 시간까지도 우리는 누군가와 맞닿아 있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못합니다. SNS의 종류도 예전보다 훨씬 다양해진 까닭에 이제는 한 번에 확인해야 하는 것들도 더 많아졌고, 나와 직접 연결된 관계가 아니더라도 꾸준히 업데이트해야 할 세상의 소식들이 산재해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먼저 정작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그 시간 동안 실로 많은 것들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그 시간을 통해 우리는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생각하는 법을 알게 됩니다. 머리로 하는 생각은 주변의 상황을 더 많이 고려하며 이해타산을 따지게 마련이지만, 마음으로 하는 생각은 그저 내면의 진실함이 무엇인지를 조용히 드러낼 뿐입니다. 우리는 모두 자가 치유할 힘과 에너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통해, 그 힘과 에너지를 깨달으면 그뿐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나’로 태어나 헐벗은 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런 ‘진짜 나’를 만나는 것이야 말로 인생의 끝에서 누릴 수 있는 최대의 뿌듯함일 것입니다. 


2016. 09. 28. 


(이 글은 수정/보완 작업을 거쳐 이지웰마인드에서 발행하는 칼럼으로 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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