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할 수 있는 방법
난 2002년 월드컵 열풍이 채 가시기 전인 그해 겨울 수능을 보았다.
400점 만점인 수능 모의고사 점수를 약 340점 안팎까지 끌어올린 데다 평소 모의고사 점수가 잘 나오는 편이었던 탓에 내심 수능 대박을 기대하고 있었다.
12년동안 공부한 걸 단 한 번의 시험으로 평가받는 수능.
악재가 이어졌다.
난 심하게 긴장을 했다. 시험보는 내내 손이 덜덜 떨릴 정도였다.
또 맨 앞자리를 배정받고 좋아했는데, 하필 그 학교 스피커는 뒤쪽에 있었다.
심지어 바로 뒤에 앉은 학생이 비닐 츄리닝을 입은 채로 수능 내내 다리를 떨어댔다.
결국엔 다 핑계인 셈이지만,
수능 가채점 결과 원래 모의고사 점수보다 100점가량 낮은 점수를 확인할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수능을 망쳤다.
세상은 내 편이 아닌 것 같았다.
유일한 성공의 길이라 알고 있었던 좋은 대학으로의 진학은 이렇게 실패했다.
당연히 재수를 해야겠다 다짐한 마음도
일주일 가량 독서실에 앉아있다보니 바뀌었다.
1년 더 이 지긋지긋한 생활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점수에 맞춰 대학에 진학했다.
어떻게든 국립대에 들어갈 수는 있을만한 점수였지만,
난 학과만큼은 양보하기가 싫었다.
담임선생님의 의견을 뒤로하고
난 신문방송학과를 고집했고, 한 사립대 신문방송학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때쯤 초등학교 때 반에서 1등을 다투었던 친구가 서울대에 들어갔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뭔가 패배자가 된 것 같은 기분.
돈도 없고, 빽도 없고, 주변엔 온통 빚만 잔뜩인 친척들,
수능까지 망친 난
어쩌면 평생 이렇게 살아가게 될런지 모르겠다 생각했었다.
수능을 망치고, 원하는 대학에 입학하지도 못했던 난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며 누구보다 만족하는 삶을 살고 있는 건 무슨 이유에서일까?
한 장의 종이에 새겨진 수능 점수에
모든 인생이 끝난 것처럼 절망적이었지만,
결국 그 점수가 내 인생을 다 말해 줄 수 없는 것이지 않나.
많은 청소년과 청년들이 수능, 대학, 돈과 같은 기준에 갇혀 힘들어한다.
나 역시 그랬다.
과연 기존의 기준과 방식들을 따라가기만 한다고 우리는 행복할 수 있는 것일까?
왜 내 주변엔 기존의 방식을 거부한 이들이 더 행복해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인생이 어려운 이유는 정답이 없어서일테다.
그래서 나만의 기준을 찾을 필요가 있다.
사회가 그어놓은 선에 맞추어 사는 게 더 편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기존의 방식, 기존의 평가기준, 기존의 환경들이 유지돼야 행복에 가까울 수 있다.
어려운 건 그러한 기존의 기준들이 나와 맞지 않을 때이다.
기존의 기준을 따라 살자니 행복하지 않고,
다들 그 기준을 따라 사니 내가 이상한 게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그러한 사람은 나만의 기준을 꼭 찾아야 된다고 말해주고 싶다.
결국 우린 행복하기 위해 살아간다.
어떤 식으로든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 필요한 요소들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니 그것을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우린 행복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