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는 얼굴을 파고드는 한기에 잠에서 깨어나 밤새 무거워진 눈꺼풀을 반강제로 열고 아침을 향해 시선을 맞추었다.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듯 노랗게 변색이 되어 버린 벽지, 바래 본래의 붉은색을 잃어버린 이름 모를 꽃 모양, 이음새가 잘 맞춰지지 않은 벽지 사이 틈처럼 기주의 아침은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시간이 아닌 듯하다. 그렇게 기주는 힘겹게 남은 힘을 끌어모아 눈을 뜨는 별것 아닌 일에 에너지를 모두 사용해 버려 그다음 행동을 이어갈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기주는 10년 전 한 지방의 문예 창작과를 졸업했다. 졸업하는 해에 이름 모를 플랫폼에서 공모한 시나리오 ‘반장과 부반장의 비밀’이라는 브라더 로맨스를 다룬 시나리오로 작가라는 것이 되었다.
운이 따른 것인지 실력이 따른 것인지…….
그날의 수상은 시나리오 고료로 받은 돈도 제법 작지 않은 돈에 더해 이제 본격적으로 작가로서 이름에 영광이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이 있었다. 그렇게 그 작품을 판 뒤로 세상이 기주라는 작가의 이름을 알지 못한 것으로 미루어 작품도 크게 주목받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오전 반나절 편의점 시간제 아르바이트를 하루의 시작으로 오후는 쿠팡 분류 아르바이트, 저녁 시간은 대리운전까지 하루 3가지 직업을 가지고 그중 그래도 남는 시간 한두 시간 정도는 글을 쓰는 것이 하루를 보내는 일정이었다. 그렇게 3가지 직업을 가지고 있었지만, 기주의 삶은 여유가 없었다. 10년째 갚고 있는 학자금 대출, 월세, 휴대폰 요금을 내고 나면 가끔은 가스 요금이 모자라 독촉고지서를 받아야 할 때도 있었다. 고지서를 받아 드는 날이면 잠을 줄여서라도 대리운전 한 건의 콜을 더 받아야 하는 것이 그날 하루를 무사히 보낼 수 있는 기주의 삶이었다.
“아, 씨발”
10년을 같은 반복된 일상으로 살다 보니 기주는 지금 욕지거리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강제로 힘을 끌어모아 일어나도 어제와 다른 삶이 없다는 기대감이 없는 어제의 반복. 기주에게 무료함을 선사하고, 내일의 삶이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무력감 그렇게 일 년의 마지막을 보내는 시점에 언제나 기주가 걸리는 병이었다. 오지 않는 봄을 기다리는 병.
병증이 퍼진 시기의 기주는 마치 다른 인격의 사람 같았다. 이맘때면 항상 오는 안부를 묻는 지인들의 안부 문자에도 짜증이 차오르고 마치 자신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고 죽음의 그림자를 확인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어 안부를 묻는 상대가 미워지기도 했다. 하얗게 세상을 뒤덮은 눈도 밉고, 지나가는 길고양이마저 이유 없이 멀리 걷어차 버리고 싶을 만큼 세상의 모든 일과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곱게 보이지 않았다. 마음이 비뚤어진 딱 그만큼 세상이 비뚤비뚤 보였다.
“오! 브로 잘 지내고 있나?” 대학 동창 덕진의 전화였다. 그나마 친분이 강한 친구라 병증을 누르고 오랜 친구의 의무를 다해 전화를 받았다.
“나는 그렇지 뭐…….”
덕진의 전화는 곧 대학 동창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함이었다.
일종의 대학 동창회 초대장인 셈이었다.
기주는 오랜만에 동창회에 나가 볼 요량이었다. 그동안 연락을 주고받은 친구도 있지만 대부분은 졸업 후 10년 만에 처음 얼굴을 보는 자리다. 그래도 기주는 지금은 자동차 세일즈맨을 하는 덕진이를 통해서 친구들의 소식을 대충은 들어 알고 있었다. 덕진은 대학 시절에도 술과 친구를 좋아하고 사람들과 어울리길 좋아하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덕진이 정반대 성격의 기주와 친해진 이유는 룸메이트이기도 했지만, 글쓰기를 좋아했던 기주는 덕진의 과제를 대신해주곤 했었다. 덕진은 성적에 맞춰 부모님의 뜻에 맞춰 반강제로 집어넣은 대학이라는 것에 크게 미련이 없었고, 열심히 해야 할 의지도 이유도 크게 없었다. 그런 그에게 기주의 친절과 재능은 친해질 이유로써는 충분했다. 그렇다고 덕진이 강제로 시키거나 친구로서 밥 한 끼로 그 대가를 치르긴 했으니 나쁜 의도가 섞이지 않은 대필 정도로 그때의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덕진은 그렇게 졸업 후 아버지가 지점장으로 있는 대기업 자동차 판매 매장 세일즈맨으로 취업했다. 그렇게 일자리가 정해진 것이라면 왜 굳이 덕진이의 부모는 대학이라는 걸 보냈을까? 한 달의 월세도 해결하기 어려운 허접한 졸업장 하나 남은 지방의 초라한 대학을…….
그래도 덕진은 그가 가진 특유의 사람 좋아하는 성격과 아버지의 후광을 업고 제법 세일즈 업계에선 이름을 날린 모양이었다. 가끔 덕진을 만나는 날이면 기주의 한 달 월급쯤 될법한 처음 보는 양주를 온 더락으로 사주며 십 년이 넘어가는 학교 다닐 때의 이야기에 빠져들기도 했다. 그 시절의 고마움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고, 항상 빠뜨리지 않고 말했다.
‘기주야 너는 꼭 작가로서 성공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라는 친구로서의 바람도 잊지 않았다.
덕진의 말에 기주는 대답을 따로 챙기지 않았다.
그렇게 이름 모를 술에 취기가 오르는 날의 기주는 자신이 아르바이트하는 편의점에 들러 만 원짜리 레드와인을 과감하게 집어 들고 프링글스 한 통의 사치까지 과감하게 체크카드의 힘으로 저질러 버렸다.
휴대폰에서 이글스의 ‘호텔 캘리포니아’가 흘러나오고, 손 무늬 자국이 심하게 남아 있는 유일하게 하나 남은 와인 잔. 전 세입자가 사용했던 것이지만 세모 모양으로 한 모서리의 이가 빠진 것 외에는 제법 쓸만한 접시에 프링글스를 덜어 기주만의 와인바를 만들고 그날은 약속으로 빠져버린 쿠팡 아르바이트도 내일 아침의 시작도 봄이 오지 않는 이유도 묻지 않고 그렇게 레드와인에 취해 간다.
취기가 머리를 짓눌러 잠에서 깨어났다. 흩어진 프링글스 조각들과 붉은빛으로 바닥을 물들인 와인 자국이 어제의 상황을 말해주고 있다. 바닥에 헝클어진 조각들과 붉은색 흘러내린 와인을 보며 10년 전의 모습으로 스며들었다. 그날 공모전에 나가지 않았더라면, 나에게 수상의 기회가 없었더라면 진작에 이 작은 재능이라는 것을 붙잡고 있지 않았을까? 아니 매년 올해만 더 해보면이라는 마음을 빨리 접었더라면 지금 궁핍한 삶을 벗어났을까? 그런 쓸데없는 잡념에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 새벽 출근을 준비했다.
오늘따라 아침부터 운수 없는 날의 연속이었다. 어제 먹은 술인지 아침에 먹은 술인지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술에 취해 아침부터 매장을 어지럽히는 진상 손님을 한참을 실랑이 끝에 돌려보냈더니, 당당하게 학교 마크와 이름까지 가슴에 턱 하니 새겨진 교복을 입고 당당하게 담배 두 갑을 달라는 어린놈들까지 기주의 인내심을 시험했다.
“아 씨발”
이런 날은 유난히 라면 취식대에서 취식을 하고 치우지 않고 그냥 나가버리는 손님 놈들도 많았다. 처진 마음이 이런 날을 만든 것인지, 운이 없는 날인지는 모르겠지만 유난히 거슬리는 일들이 연속으로 일어나는 그런 하루의 아르바이트를 마감하고 동창회 참석을 위해 오후 쿠팡 아르바이트는 가지 않을 심산이었다.
기주는 10년째 가장 중요한 날이면 입는 진한 남색 코트를 꺼내 입었다. 캐시미어 양모 코트 재질로 고료를 받은 날 제법 많은 돈을 주고 산 준 명품 코트였다. 명품이라는 이름에 어울리게 10년이 지난 지금도 크게 촌스럽지 않은 자태를 뽐내고, 되려 빈티지한 느낌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작가라는 직업과 더 어울리는 낡음이라고 기주는 단벌의 이유를 찾아내어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렇게 코트를 걸치고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사람들의 말소리와 음악 소리 거리의 풍경까지 소리가 되어 뭉쳐진 이맘때의 모습이다. 언제나 의식하지 않고 보려는 노력이 필요해 보이는 풍경의 소리 그렇게 기주는 친구들의 환대를 받으며 졸업 후 10년 만에 동창들과 만났다.
‘와! 정 작가!’ 기주가 모임에서 처음 들은 말이었다. 기주는 별도의 대답을 챙기지 않고 가벼운 목례와 체온 없는 악수로 그 대답을 대신했다.
이제 중년의 나이가 되어가는 동창들은 새로 바꾼 차, 새로 이사한 집, 둘째의 소식 등 새것과 내일에 대한 걱정들로 가득했다. 여느 다른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이야기들에 영혼이 없는 고개 끄덕임으로 그들의 삶과 나의 삶이 다르지 않다는 최대한 그들을 존중하고 이해한다는 표정과 동작을 하고 있었다.
“정 작가 넌 그래도 우리 중 글을 써서 먹고사는 사람이 될 것이라 예상했다. 그래도 우리 중 전공을 살려 사는 네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 아니겠어?” 덕진이 제법 큰소리로 좌중을 이목을 기주에게 집중시켰다. 기주의 얼굴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확 달아올라 선홍빛을 넘어 활짝 핀 한여름 장밋빛이 되었다.
“아! 씨발”
기주는 500cc 맥주잔에 담긴 맥주의 반을 벌컥벌컥 마시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다행하게도 맥주의 목 넘김이 벌어준 시간만큼 그들은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매우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그 짧은 시간에 한마디만 더 거들었다면 아마 그 뒤로도 꽤 많은 기주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동창회의 중심에 있었을 것이다. 문학과 소설을 논하던 10년 전 그 모습으로 돌아가 버렸다면 기주는 참고 있던 불편함에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야 했을 것이다.
“왜 왔을까? 그것도 10년 만에…….”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이제 자리가 정리되어 가는 분위기였다.
“오늘의 회비는 모임 비용과 회비를 포함 각자 15만 원씩 내 카카오 페이로 보내면 됩니다.”
덕진이 모두가 들리게 큰소리로 회비에 대한 내용과 다음 모임에 관한 이야기를 전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2차로 자리를 옮기려는 사람들. 서로 다음을 기약하는 사람들이 뒤섞여 잠시 혼란한 틈 사이로 ‘기주야 너는 안 보내도 되니 그냥 모른 척해’ 덕진이 나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니야 아니야 나도 보낼게. 그 정도는 괜찮아” 그 정도는 그 정도는 그 정도는 …….
“아! 씨발, 왜 왔을까”
기주는 코트를 챙겨 들고 동창들에게 한 명씩 빠지지 않고 인사를 나누었다. 그렇게 인사를 나누고 재빠르게 돌아서 발걸음을 가장 가까운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그렇게 기주는 도착한 버스의 번호도 확인하지 않고 가장 먼저 도착한 붉은색 광역버스에 올랐다.
한참을 무의식 속에서 바라본 창밖 세상은 도심의 혼란을 벗어나 한적함의 흐름으로 바뀌고 있었다. 이제야 기주는 정신이 또렷해졌다. 기주는 바로 휴대폰의 15만 원을 덕진이 불러준 계좌로 이체했다. 그렇게 이체를 마치고 창문에 입김을 불어 주먹을 움켜쥔 발바닥 모양 도장을 찍었다. 발바닥 모양 사이로 차량의 속도와 함께 움직이는 세상이 선명하게 보였다.
밤이 이슥하게 내리기 시작한 눈 내린 밤의 익숙한 풍경.
10년 전 공모전 상금으로 코트를 사고 돌아가던 눈이 내린 포근했던 그날, 학교 기숙사로 돌아가던 풍경과 같았다.
그렇게 기주는 버스에 오를 때와 같은 마음으로 하차 버튼을 눌렀다.
“내리실 거예요? 이제 시내로 나가는 버스는 없어요.”
“알고 있습니다. 이번 정류장에서 내립니다.”
버스의 앞문이 열리고 인적이 많지 않아 내린 눈을 치우지 않은 제법 깊이가 있는 눈에 첫발을 내려놓았다.
「보드드득」 눈이 서로 엉겨 압축되는 소리가 기주를 맞아 주었다.
처음 보이는 편의점의 앞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바지 밑단까지 차오른 눈을 강하게 발을 굴러 털어내고 편의점 문을 열고 안으로 향했다.
주인으로 보이는 백발이 눈에 띄는 주인, 호빵의 김이 코끝을 자극해 평소 느끼지도 못했던 식욕을 자극했다.
“팥 맛 호빵 하나 주시겠습니까?”
“저기 집게로 잡숫고 싶은 놈으로 가져 오슈”
뜨거운 열기를 내뿜는 팥 호빵이 두툼한 종이에 쌓여 기주에게 내밀어졌다.
“말보로 레드 하나 라이터 하나같이 주세요.”
기주는 10년 전 끊어 버린 담배와의 인연을 다시이었다.
오랜만에 깊게 빨아 드린 연기는 알딸딸한 술기운에 더해 기분 좋은 세상이 돌아가는 느낌을 선사해 주었다. 그 느낌은 기주의 긴장된 정신을 오랜만에 여유 있게 해 주었다. 눈앞에 눈을 밟아도 깊게 빠져들어 가지 않을 것처럼.
한 번 더 깊게 빤 담배는 어둠이 깊어질수록 순간적으로 붉은빛을 뿜어냈다.
마치 10년 전 공모전상을 받을 때의 타오를 것 같았던 기주처럼.
그렇게 담배 한 개비를 다 피운 기주는 타오르는 담배를 눈밭에 툭 하고 던져 열기에 눈 속을 파고드는 반쯤 남은 담배를 지켜보며 발로 꾹 눌러 마지막 남은 불씨를 꺼버렸다.
“아 씨발, 가자 오지 않을 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