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진 말은 되돌아와 나를 상처 내는 것_3월 25일.
전화가 울렸다.
“어디야? 밥은? 바빠?” 언제나 반복되는 단어를 조합한 큰 사건이 없는 일종의 안부 전화.
지천명을 지났어도 아니 팔순, 구순이 되어도 세상 모든 어머니에게 자식은 돌잡이 때의 그 모습인 듯. 엄마 자신에겐 사진에 한 장면으로 박혀 지나가는 세월을 붙잡아 놓은 모습으로 남겨져서 일 듯싶다.
그 세월에 답인 듯 대답은 언제나 “왜? 바쁘니까 나중에 통화해” 보통 이렇게 전화를 마무리하는 게 일상적이다. 그렇게 끝내지 않으면 언제나 그 뒤로 이어지고 길어지는 잔소리를 감당하기가 쉽지 않다. 사실 그렇게 대화 한마디 못 할 정도로 바쁘지도 않으면서 잔소리가 싫은 건지 대화가 싫은 건지…….
오늘은 어찌된 일인지 회사 근처로 왔단다. 전해줄 물건이 있다며, 만나기로 한 장소에 나와 있는 왜소한 노인. 등도 구부정하고 그래도 봄이라 화사한 색깔의 아이더 봄 잠바는 걸쳐 그렇게 추리해 보이진 않는 모습이라 다행이었다. 물건은 본인의 집에 선물로 들어온 고기, 식빵, 딸기잼 등 본인은 입맛도 별로 없고 먹는 양도 줄어 놔둬 봐야 음식물 쓰레기가 될 것이 뻔한 인사라 먼 거리를 꾸역꾸역 전해 주러 왔단다. 두 개의 쇼핑백이 손으로 전해진 순간 전해진 무게만큼 짜증이 저울질 됐다. 내가 감당하기도 무거운 물건의 무게를 두 손으로 들고 장거리를 이동했다는 사실. 수술 후 회복 중인 자기 몸을 돌보지 않는다는 사실에.
나는 그렇게 엄마를 또 모진 말로 찔렀다. 그렇게 찌른 말은 나에게 가시가 되어 돌아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매번 다짐을 벗어나지 못하는 쳇바퀴 굴레의 형벌을 받는 것만 같다.
나의 엄마도 세상의 어머니만큼 강한 사람이다. 아직도 잊지 못하는 수많은 기억 중 하나. 모진 비바람이 흩날리던 관악산을 등반하던 날 힘들다고 칭얼거리는 7살쯤이었던 (정확한 기억은 없다.) 제법 무게가 나가는 어린것을 등에 업고 등반했던 기억, 다리 다친 9살쯤의 아들의 등하교를 맨몸으로 책임진 기억 그렇게 엄마는 강했다. 언제나 강해서 상처도 스펀지처럼 흡수할 수 있는지 알았다. 그래서 언제나 나는 모질게 찔렀다.
엄마는 설 명절쯤 해서 담도염으로 수술을 받았다. 처음으로 엄마보다 내가 어른의 역할을 해야만 했다. 그렇게 병원 생활을 하며 나는 처음 알았다. “나는 매운탕을 좋아해.” 적잖은 충격이었다. 평생을 매운 걸 못 드신다고 내가 판단하고 그렇게 생각하고 살고 있었다. 그렇게 의사를 물어본 적도 없더랬다.
그렇게 한참 후에 또 전화가 왔다. 이번엔 누나에게 “엄마가 돌아오는 길에 넘어져 팔이 골절됐단다. 내일 수술해야 해.” 속상함에 나는 또 가시를 내뱉었다. “그러길래 뭐 하러 여길 왔냐고. 이깟 거 사 먹으면 그만인 것을” 그렇게 내뱉는 전화기 너머의 엄마는 아무런 말이 없다. 모질게 찌른 말은 나에게 가시가 되어 돌아온다. 바보 멍청이 나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