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식원 담장 밖의 몸보신
슬기로운 광주 단식원 생활, 다섯 번째 이야기
앉았다 일어나면 단식원 천장의 하얀 형광등이 컴컴한 밤하늘로 바뀌었다. 그 위에서 노란 별이 수놓아 쏟아지며 금세 사라지곤 했다. 기립성 저혈압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증상과 함께 많은 출혈을 보는 생리 기간까지 겹쳐 식사 제공이 안 되는 3주 차 일요일에 몸보신을 강행했다.
몸보신 메뉴는 광주지역에서 유명한 나주곰탕!
혼밥이 머쓱했던 건지, 다이어트 기간에 외부음식을 먹으려는 나 자신이 껄끄러웠던 건지
쭈뼛거리며 나주곰탕 맛집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식당 문을 열자마자 진하고 구수한 고기 국물 향이 훅 끼쳐왔다. 나주곰탕은 냄새만으로도 힘을 주는지 쭈뼛거리던 모습은 금세 활력으로 바뀌었다.
메뉴판에는 한눈에 들어오는 단출한 메뉴와,
한구석을 당당히 차지하고 있는 그 녀석, 소주가 눈에 띄었다.
'여행을 갔으면 그 고장의 지역 소주를 꼭 먹어봐야 한다'는 신조를 가진 나였기에,
광주 지역의 대표 소주, 잎새주까지 같이 주문했다.
지방 특성상 식당에는 젊은이들보다는 주로 어르신들이 많이 계셨고,
혼자서 오시기보다는 동년배분들과 다 같이 무리 지어 오시는 단체 손님인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주문은 역시 나주곰탕과 식당의 효자 메뉴인 소주.
태생부터 찍혀 나온 거처럼 똑같은 공간에 표기된 종이들이 연신 쌓여갔다.
저 수북한 종이들 틈에 끼인 내 음식은 언제쯤 제일 앞으로 나올까 싶었지만,
분주한 아주머니의 숙련된 일 처리에 내가 주문한 메뉴들이 테이블 위에 빠르게 펼쳐졌다.
광주의 곰탕은 뽀얗게 맑았고, 여러 부속물이 가득 들어가 있었다.
괜히 숟가락으로 곰탕을 한 번 스윽 휘저어 보고,
푸짐한 건더기에 흐뭇해져 미소를 지었다.
곰탕보다 더 메인 같은 잎새주에 슬그머니 손을 올려 내 쪽으로 끌어당겨 뚜껑을 깠다.
쪼르륵-
뜨거운 김 폴폴 나는 국밥을 한 수저에 가득 담아 입에 넣었다가 빼면, 말끔한 은빛 머리만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투명하고 옴폭한 작은 잔에 청아한 소리를 내며 흘러나온 소주를 입술에서 목구멍까지 천천히 음미하며 마시고 있을 때쯤-
한쪽에서 들려오는 노인의 낮은 목소리.
"요새는 젊은 여자들이 말야, 아무 데서나 술이나 처먹고 말이야"
마치 나를 겨냥해 들으란 식으로 작지만 분명하게 말하는 늙은 목소리가 내 귀를 때렸다.
직접 맞지는 않았지만, 말로써 한 방 맞은 듯한 얼떨떨한 기분과 얼얼하게 달아오르는 귀.
취기와 뒤섞여 복합적인 감정이 귀를 타고 올라갔다.
순간 입맛이 뚝 떨어져 숟가락을 내려놓고 술병을 바라봤다.
'여자는 혼자 술을 마시면 안 되는 건가?'
'여자는 국밥에 소주 한 잔 기울일 자유가 없는 건가?'
소리 없이 잎새주와 눈 대화를 나눴다.
하지만 이내 곧 내린 결론, '저 낡은 사상에 지지 말자.' '더욱 보여줘야 한다'는 반항심이 올라왔다.
손으로 소주병을 잡고선 소주잔이 아닌 내 입으로 병을 가져갔다.
그리고는 근사하고 멋진 나팔을 불듯이 병나발을 불었다.
낡은 것에 대한 타파,
억압에 대한 반항,
참았던 욕구에 대한 폭발,
무례함에 대한 복수심으로 있는 힘껏 병 주둥이에 집중하여 소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 할아버지가 보고 있을 거란 생각에 더욱 세차게 마셨고, 후련함에 쾌감까지 느껴졌다.
수치심에 달아올랐던 귀와 볼따구는 소주가 주는 기쁨의 표식이 되어 더욱 붉어졌고,
다 먹을 때까지 계속되는 병나발과 함께 맛있는 곰탕까지 싹싹 비웠다.
그날 내가 지켜낸 것은 단순한 소주 한 병이 아니었다. 낡고 불쾌한 잣대가 내 자유를 더럽히지 못하게 막아낸, 나 자신의 주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