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코스(제주관덕정분식←조천만세동산, 20.1Km) 4
몸에서 신호를 보낸 곳은 역시 무릎이었다. 무릎보호대를 착용했는데도 발로부터 전해져 오는 충격은 감당할 수 없었나 보다. 또한 몸속에 물이 차오른 듯 피로로 몸은 무거워져 갔다. 아무리 바다와 갈대 그리고 시원한 바람이 마음이나 머릿속을 환기해도, 그것으론 온몸에 채워지는 피로를 막기엔 한계가 있었다. 환기는 피로를 잠시 잊게 하는 진통제일 뿐, 그 효과와는 상관없이 피로는 그냥 퍼졌다. 그런데 너무 이르게 피로가 왔다. 오전이었다. 잠시 멈추고 짧게 스트레칭을 하며 바다를 봤다. 멀리 거대한 배들이 보였다. 여객선도, 화물선도 있는 것 같았다. 잘 보이는 곳에 컨테이너들이 쌓여있다. 제주항이었다.
근처에 바다를 향해 흐르다 식어버린 용암류 위에서 홀로 바다낚시를 하는 이에게 눈길이 갔다. 서서 미동도 없이 낚싯대를 계속 보고 있었다. 물고기가 낚일까? 이렇게 바다가 거칠면 찌도 마구 흔들려 물고기가 물지 않을 텐데. 스트레칭으로 잠시 멈춘 길을 다시 걸으며 이었다. 계속 그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그대로 있었다. 저러다 망부석 전설처럼 저 형상으로 바위가 되는 건 아닐까? 그는 무엇으로 저 긴 기다림을 버틸까? 지금은 기다림조차 잊은 것은 아닐까? 아마 바위 같은 그에게 필요 없는 생각들이 피고 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변화무쌍한 생각들이 현실을 지우고 있는 건 아닐까? 미끼를 문 물고기의 몸부림이 손으로 전해져 올 때 비로소 그는 바위에서 그로 돌아올 것이다. 나 또한 해안 길을 걸으면 이런저런 생각이 스쳐 간다. 길이 길다고 하나의 생각이 그 길의 길이만큼 깊어지지 않는다. 그 생각은 뚝뚝 끊겨 조각나고 연결되지 않는다. 때론 다른 생각이 이전 생각을 지워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해안 길은 단조롭지만, 생각이 많은 변덕스러운 길이기도 하다. 홀로 낚시하는 그나, 홀로 길을 걷고 있는 나나 패치워크 같은 생각의 무늬를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같을지 모른다. 다만 그는 정적이고 나는 동적이라는 것이 다를 뿐. 이 생각도 곧 다른 생각에 바로 지워질 것이다. 그는 여전히 바위처럼 서 있다.
호젓한 해안 길에 집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기수갈고둥’이라고 쓰인 커다란 안내판이 있는 곳에서 길은 샛길로 빠졌다. ‘기수갈고둥’의 이미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바다와 하천이 만나는 지점(이런 곳을 기수라고 부른다. 그래서 기수갈고둥이다)에서 자갈과 돌이 많은 곳에 살았으나, 지금은 개발과 퇴적물 증가 등의 환경변화로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멸종위기 야생 생물 2급 보호 대상 생물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민물 고둥 중에서 가장 오래 산다고 한다. 무려 12년이나 살 수 있다. 저 작은 것이 그렇게 오래 산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러나 과연 12년을 다 채우고 죽어가는 것이 현재 얼마나 될까?
길은 바다로 작은 호를 그리다 화북천을 타고 내륙으로 올라갔다. 여기에서 4·3 유적지인 곤을동 마을을 만났다. 더 정확히는 안내석을 만났다. 마을은 없었고 제주 4·3 사건 당시 초토화되어 마을 터만 남았다. 화북천 건너편에 풀로 덮인 돌담들이 보였다. 그곳이 지금은 사라진 곤을동 마을이었다. 카카오맵을 보면 그곳은 ‘잃어버린 마을 곤을동’으로 표기되어 있다. 서울로 올라와서 곤을동에 대해 알아봤다. 곤을동 터에 가면 ‘잃어버린 마을 곤을동’이라는 안내판이 있고 당시 일어난 일을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적고 있었다.
.... 곤을동이 불에 타 폐동이 된 때는 1949년 1월 4일과 5일 양일이었다. 1949년 1월 4일 오후 3~4시께 국경수비대 2 연대 1개 소대가 곤을동을 포위했다. 이어서 이들은 주민들을 모두 모이도록 한 다음, 젊은 사람 10명을 바닷가로 끌고 가 학살하고 안고을 22 가구와 가운데곤을 17 가구를 모두 불태웠다.
다음 날인 1월 5일에도 군인들은 인근 화북초등학교에 가두었던 주민 일부를 화북동 동쪽 바닷가인 ‘연디밑’에서 학살하고, 밧곤을 28 가구도 모두 불태웠다. 그 후 곤을동은 인적이 끊겼다....
어딘가에서 흩어져 살았을, 뿌리 뽑힌 생존자들의 고통은 가늠할 수 없다. 내 경험을 넘어선 것이라 감히 고통이라는 말조차 언급하기에 조심스럽다. 사라진 곤을동을 글과 그림으로 살려내 이야기한 동화책이 있었다. 2024년에 발행된 ‘곤을동이 있어요’(저자:오시은/그림:전명진/출판:바람의 아이들)라는 책이다. 책에서는 아름답게 피어나 폐허로 진, 수채화로 그린 곤을동 마을을 볼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올레길에서 만난 북촌(19코스)과 표선 읍(3코스 종점, 4코스 시작점)에 발생한 4·3 사건도 소설도 그려져 있다. 바로 현기영의‘순이 삼촌’(북촌)과 한강의‘작별하지 않는다’(표선 읍)이다.
개인적으로 곤을동이 18코스에서 가장 아쉬운 곳이었다. 길은 도로에서 샛길로 빠져 화북천을 거슬러 올라가 별도봉 입구로 이어진다. 샛길로 빠지지 않고 도로로 별도봉에 가도 된다. 그것이 빠른 길이다. 굳이 화북천을 거슬러 올라간 이유는 곤을동 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곤을동 터는 화북천 건너편에 있다. 지금의 길은 화북천을 건너 곤을동 터로 가지 않는다. 가려면 선택해야 한다. 시간적 여유가 많지 않은 이상 곤을동 터에 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걷는 이들은 많지 않을 것 같다. 다들 유적지 안내석만 보고 지나칠 것이다. 물론 물이 불었을 때 하천을 건너는 것이 위험해서 길을 만들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래도 길을 그쪽으로 만들었으면 했다. 지도를 보면 곤을동 터를 지나는 길은 별도봉을 지나는 길과 다시 만나기 때문이다. 그곳을 가지 못해 너무 아쉬웠다.
별도봉 숲길은 별도봉 정상으로 가지 않고 옆으로 돌아 사라봉으로 이어졌다. 옆길은 생각보다 길었고 시야는 딱 트였다. 길 중간에 충분히 쉬며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긴 전망대가 있다. 나도 잠시 쉬었다. 제주항이 보였다. 바다에 떠 있는 인공섬 같았다. 어떻게 건설되었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생각을 멈추고 다시 걸었다. 여기서부터 별도봉과 구분 지으려는 듯 사라봉은 돌계단으로 시작했다. 돌계단을 지나면 오른쪽 공터에 돌담과 함께 몇 개의 돌이 세워져 있고, 그 앞에는 돌로 된 몇 단의 긴 관람석이 있다. 이곳에서 어떤 공연을 펼치나 보다. 안내판이 보였다. ‘제주칠머리당영등굿’
영등굿은 매년 음력 2월, 제주에서 심부(무당)들이 영등신에게 풍작과 풍어를 기원하며 벌이는 굿을 말한다. 영등신은 본래 ‘강남천자국’ 또는 ‘외눈박이섬’에 사는 바람의 여신(영등 할망)이다. 매년 음력 2월 1일에 제주도에 와서 섬을 돌며 바다에 미역, 전복, 소라 등 해녀 채취물의 씨를 뿌려 번식시켜 주고 어업이나 농업에도 풍요를 준 뒤 2월 15일에 다시 본국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영등굿은 제주 전역에서 벌어지지만, 건입동의 제주칠머리당영등굿이 가장 대표적이다. 제주칠머리당영등굿은 제주시 건입동(칠머리는 건입동의 속칭)의 본향당인 칠머리당에서 열리는 굿이다. 음력 2월 1일에 영등신이 오는 것을 반기는 영등환영제를 시작하여, 2월 14일에 영등신을 보내는 영등송별제로 끝을 맺는다. 두 번의 굿 중에서 송별제가 환영제 보다 훨씬 큰 규모로 치러진다. 칠머리당은 원래 제주항 부근에 있었다가 제주항이 확장되면서 현재 사라봉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그리고 제주칠머리당영등굿은 국가무형유산과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지정되어 있고, 전수관이 사라봉에 있다.
이곳이 제주항에서 옮겨온 칠머리당보다는 오히려‘제주칠머리당영등굿’이 펼쳐지는 곳으로 보였다. 안내판이 없었다면 이곳이 중요한 곳인지 몰랐을 것이다. 조경을 위하여 공원에 세워진 공간처럼 보였다. 다시 움직여 계속 올랐다. 사라봉 정상에 봉수대가 있었다. 올레에서 봉수대는 처음 본 것 같다. 그동안은 해안의 연대만 봤다. 구조나 모양은 연대와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정상에는 팔각정도 있었다. 정자에 오르니 넓게 펼쳐진 제주시의 전경을 볼 수 있었다. 제주항 일부가 보였다. ‘제주칠머리당영등굿’이 다시 떠올랐다. 생각해 보면 음력 2월 초면 양력으로 2월 말이나 3월 초일 것이다. 계절이 겨울에서 봄으로 바뀌는 환절기다. 흔히 말하는 꽃샘추위가 맹위를 떨치는 시기이다. 이런 환절기에는 기상 변화가 잦다. 즉 날씨를 예측할 수가 없다. 기상 변화의 원인을 바람으로 봤을 것이다. 어제 세화에서 마주한 바람을 통해 그것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그래서 바다에서 부는 바람을 여신으로 모시고 안녕을 빈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빈 겨울이 만물이 되살아나는 봄으로 바뀌는 시기이므로 풍요로운 어업과 농업도 같이 기원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환영제보다 송별제를 더 크게 치른 것이다. 독특한 점은 바람의 신이 남신이 아닌 여신이라는 것이다. 다른 신화에서 바람의 신은 대부분 남신이다. 이것은 제주도가 가지고 있는 어떤 독특함과 제주도민의 정체성과 연결되는 것은 아닐까? 이런 의미에서 제주 전역에서 행해지는 바람의 여신(영등 할망)을 위한 영등굿은 제주도민의 삶에 짙게 배어있는 어떤 색을 드러내는 풍속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욱 칠머리당의 위치에 대한 아쉬움이 남았다. 영등 할망은 바람의 여신이니 그녀를 위한 칠머리당은 산보다는 바다가 더 어울리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는 이전이었지만 매우 아쉬웠다.
(2024. 1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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