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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 폐가

18코스(제주관덕정분식←조천만세동산, 20.1Km) 2

by 커피소년

조천 마을의 집들이 엷어졌다. 그만큼 길은 뚜렷해졌다. 현무암 돌들이 놓인 곳 위에 콘크리트로 만든 길이었다. 길은 자연과 인공의 부조화된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바다를 가로질러 맞은편 초원지대에 닿았다. 안쪽의 바다는 닫혀 작은 호수가 되었다. 길의 중간에 돌탑 공원이 이다. 현무암으로 쌓은 검은 탑들이 군데군데 세워져 있고 바다로 나간 것도 있었다. 바닷물이 물러나서 그런지 길에서 바다로 약간 먼 곳까지 검은 현무암 돌들이 깔려 있었다. 검은 돌들의 바다. 바닷물이 들어차면 돌들은 잠길 것이고 몇몇 탑들도 밑은 잠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밀려오는 파도는 항상 부드럽지만은 않을 텐데, 그럼에도 탑들이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것이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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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지른 길과 닫힌 바다 그리고 검은 현무암의 바다와 탑들>

길이 검은 현무암의 바다를 건너 닿은 곳에는 갈대가 무성했다. 가벼운 아침 바람에도 흔들리는 갈대가 뿌리를 내린 곳은 대섬이었다. 조천 마을과 신촌 마을의 경계에 있는 작은 섬(지금은 신촌과 연결되어 있으니 섬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이었다. 점성이 낮아 넓은 지역으로 퍼지면서 흘러내린 용암은 공기와 접촉하여 표면이 살짝 굳어진다. 그러나 내부의 용암은 여전히 높은 온도를 유지하고 있어 그 압력에 의해 표면이 빵처럼 부풀어진다. 그 모양으로 식으며 만들어진 섬이었다. 길에서 흙이 없는 곳에는 어김없이 딱딱한 검은 표면이 드러났다. 그때마다 나는 거대한 거북이 등 위를 걷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상상을 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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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섬의 갈대와 풀들 / 드러낸 용암류 표면>

어제의 피로로 여전히 몸은 무거웠다. 그래도 갈대를 흔든 바람이 몸을 흩고 지나면 무거움이 조금씩 씻기는 것 같았다. 어제의 바람은 몸에 무게를 달아주더니 오늘의 바람은 무게를 덜었다. 흔들흔들 갈대 길은 짧았다. 길은 다시 마을로 들어섰다. 신촌이었다. 마을 길에서 게스트하우스에서 나온 20대 여성 올레 순례자를 지나쳤다. 등산복 차림이었고, 아침이지만 피곤으로 지친 모습이었다. 내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조금 부러웠다. 그녀에게 여유로움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어제 조금만 더 걸었으면 18코스를 끝낼 수 있었을 텐데,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신촌에서 쉬었다. 나라면 무리해서라도 걸어서 끝냈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멈췄다. 그녀에게 코스의 시작점과 종점은 그냥 지나는 길 위에 있는 포인트일 뿐이었다. 코스의 집착은 없었다. 그녀 자신이 코스의 시작이고 끝이었다. 이런 생각이 부러웠다. 그러기에 피로 속에도 여유가 보였다. 나는 여전히 코스에 집착하여 하루 안에 어떻게든 끝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래서 여유가 없다. 여전히 나는 목적 지향적이었다. 어쩌면 그녀도 목적 지향적일지 모른다. 다만 목적이 외부를 향한 나와 다르게 그녀는 자신을 향해 있다. 그녀는 조천으로 가고 있다. 그래도 길을 걷는 것은 힘든 일이다. 대섬에서 갈대를 보며 몸과 마음이 환기되길 바랐다.

20241021_084903.jpg <신촌 마을로 들어서는 올레 길의 입구>

마을 길은 바로 바다를 가로지르는 길로 변했다. 바다 풍경을 보니 뭍에 가까운 바다에 현무암 돌로 쌓은 긴 담이 보였다. 그것을 돌담 공원에서도 봤었다. 그때는 해변에 있던 현무암 돌들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여기서 보니 이상했다. 인공적인 느낌이 들었다. 사람이 일부러 쌓아 놓은 것 같았다. 그때 떠올랐다. 조천의 용수천 안내판에 있던 원담이라는 전통 어업방식이라는 단어가. 사진을 보니 모양이 비슷했다. 원담이었다. 원담은 수심이 얕고 경사가 완만한 바닷가에서 돌담을 설치해 놓고 물고기를 잡는 전통 어업방식이다. 밀물과 썰물의 수심 차이를 이용하여, 밀물 때 물을 따라 들어와 썰물 때 미처 빠져나가지 못하고 돌담에 갇힌 물고기들을 직접 잡는 것이다. 지금도 저 방식으로 잡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안내판을 보니 지금은 체험장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한다.

20241021_083912.jpg <조천의 용천수 안내도에 있는 원담(원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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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촌에서 바다를 가로지르는 길애서 본 바다 쪽 풍경에 있는 원담 (좌)과 안쪽의 풍경(우)>

이후 해안과 마을이 번갈아 가며 길의 풍경을 바꿨다. 도중에 생활용수로 쓰였던 용천수인 큰물(현재도 사용되고 있다)과 버려진 폐가가 종종 보였다. 원인이 무엇이든 버려진 것에는 안타깝고 쓸쓸한 감정이 스며든다. 특히 폐가는 더욱 그렇다. 집은 사람에게 없어선 안 될 공간이다. 외부의 혹독한 환경으로부터 사람을 보호하기도 하지만 인생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적인 공간으로, 정서적으로 밀접하게 엮여있기 때문이다. 집에 대한 기억에서 온기를 느끼는 것은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폐가에서는 이런 온기를 느낄 수 없다. 조용히 삭아가는 모습에서 이 공간에 스며있던 모든 추억 또한 시간에 녹아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그 느낌에 애잔함이 일었다.

20241021_090516.jpg <여성들이 물을 긷고 채소를 씻고 빨래를 했던 큰 물, 현재는 여름에 어린이들의 물놀이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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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가>

신촌 마을을 벗어나면 얕은 동산이 나온다. 이곳에는 4.3 사건 당시 사람들을 감시하기 위해 돌을 직접 쌓아 만들었던 성터가 있다고 한다. 오르며 보니 꼭대기에 현무암으로 쌓은 성벽 같은 것이 보였다. 저긴가 하며 오르다 뒤를 돌아봤다. 흐린 하늘, 파랑이 사라진 바다, 그리고 살랑이는 갈대가 보인 풍경에서 쓸쓸함이 또 밀려왔다. 잠시 그것에 젖어들었다. 그리곤 4.3 성터를 잊었다. 걷다 보니 쉼터가 있었고 바로 앞에 바다로 조금 나간 작은 곶에 정자 하나가 보였다. 닭모루(달머르)였다. 바닷가로 툭 튀어나온 바위의 모습이 닭이 흙을 걷어내고 들어앉아 있는 모습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갈대가 흔들리는 길을 따라갔다. 정자에서 잠시 쉬었다. 에너지 바를 먹으며 풍경을 봤다. 바다 풍경보다 육지 풍경이 더 좋았다. 흔들리는 갈대와 나무 데크로 걷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 때문이었다. 정적인 풍경에 과하지 않은 작은 흔들림이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이때 4.3 성터가 떠올랐다. 그러나 늦었다. 다시 돌아가 확인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냥 앞으로 나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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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성터 오르막길, 끝에 성벽이 보인다(그러나 저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오르며 뒤돌아 본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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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모루와 주변 풍경 / 멀리서 본 닭모루-나는 웅크린 강아지처럼 보인다>

결국 4.3 성터를 확인하지 못하고 닭모루를 떠났다. 길은 숲길로 이어졌고 숲길 전에 닭모루를 봤다. 내 눈에는 아무리 봐도 닭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순둥이 강아지가 앞발로 턱을 받치며 엎드려 있는 모습으로 보였다. 높지 않은 해안 절벽을 오르고 내려가길 반복했던 숲길은 전망이 탁 트인 곳에서 내륙으로 향했다. 그리고 도로에 닿았다. 도로의 인도를 걸을 때 감귤이 열린 귤나무를 봤다. 아마 올레를 걸으며 본 첫 감귤이었다. 익으려면 멀었는지 귤은 아직 초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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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레 길에서 처음 본 감귤 나무>

걷고 있던 도로는 오르막길이었다. 자전거 한 대가 지나갔다. 힘겹게 페달을 밟고 있었다. 자전거로 제주를 일주하고 있는 것 같았다. 4월, 성산의 게스트하우스에서 룸메이트였던 라이더가 생각났다. 그때 그분은 동년배 여성 다섯 분을 이끌고 자전거로 제주도를 일주하고 있었다. 오랜 세월 자전거를 타온 것 같았다. 햇볕에 그을린 피부가 그것을 증명했다. 그분이 내게 했던 “걷는 것도 좋은데 자전거로 제주를 일주하는 것도 좋으니 한번 해봐”라는 말도 떠올랐다. 아직은 자전거보다 걷는 게 좋았다. 그분과 대화하면서 자전거를 어떻게 제주도로 가져오는지 궁금했었다. 그런데 어제 새벽 김포공항에서 플라스틱으로 된 커다란 이사 포장 상자에 자전거를 넣고 있는 라이더를 보고 알게 되었다. 그렇게 포장되어 화물로 실려 오는 것이었다.

20241021_094712.jpg <힘겹게 오르고 있는 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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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양동- 올레 길에서 처음 만난 도시 / 용천수가 있던 샛다리물>

도로의 언덕에 도달하면 길은 삼양동이라는 안내석 앞에서 횡단보도를 지나 도로 옆으로 빠졌다. 집과 숲과 밭으로 이루어진 한적한 길은 어느새 마을이 아닌 도시로 들어섰다. 도시의 어느 곳에서 볼 수 있는 집들이었고, 길들은 직선이었다. 이곳이 삼양동이었다. 올레를 걸으며 처음으로 본 도시였다. 주택가의 길을 따라 내려가면 해안 도로와 만난다. 이곳의 용천수 중 하나인 샛다리물(굿할 때 사용하는 물로 나쁜 새인 까마귀를 쫓는 다른 새쫓음에서 유래)을 알리는 안내석에서 왼쪽으로 따라가 18코스 중간 스탬프가 있는 삼양해수욕장에 닿았다. (2024. 1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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