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코스(제주관덕정분식←조천만세동산, 20.1Km) 1
새벽에 일어났을 때 몸은 여전히 무거웠다. 관절들은 굳어 움직일 때마다 삐걱거렸다. 간단한 스트레칭을 한 후 따뜻한 물로 샤워하며 무거움을 조금씩 덜어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준비한 빵과 우유를 먹고 나왔다. 아침 7시 30분이었다. 날은 어제와는 달랐다. 회색 구름은 여전히 하늘에 풀어져 있지만 어제보단 가벼워 보였다. 간간이 파란 하늘도 얼굴을 드러냈다. 바람은 무엇 하나 흔들지 못했다. 18코스 종점에 갔다. 여기서부터 역방향으로 걸어야 한다. 도로 건너편에 조천만세동산이 보였다. 무척 넓었다. 평일 아침이라 그런지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고요했다.
제주에는 3대 항일운동이 있다. 성산 제주해녀항일운동, 서귀포 법정사항일운동 그리고 조천만세운동이다. 성산 제주해녀항일운동과 관련해서 올레 20코스 종점이자 21코스 시작점 근처에 제주해녀항일운동 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그리고 1-1코스인 우도 천진항에도 우도해녀항일운동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서귀포 법정사항일운동과 관련된 법정사는 한라산 자락에 있고, 올레길은 이곳을 지나지 않아 걷는 동안에는 갈 수 없다. 조천만세동산은 조천만세운동이 일어났던 곳에 조성된 기념공원이었다. 이곳에는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을 추모하고 평화를 염원하는 <애국선열 추모탑>, 만세운동의 뜻을 기억하고 기리기 위해 세워진 <3·1 독립운동 기념탑>, 항일운동 관련 역사 자료를 전시하는 <항일기념관> 등이 있다. 시간이 없어 <애국선열 추모탑>에만 가보았다. 긴 뿔 같은 추모탑이 하늘을 향해 우뚝 서 있었다. 제주의 전통문인 정주문(정낭)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추모탑 주변에 세워진 절규와 함성이라는 조각상을 보고 내려왔다.
편의점에서 에너지바와 물을 사고, 도로를 따라 해안가 쪽으로 내려갔다. 해안도로와 만나는 모퉁이에 조천연대가 있었다. 해안의 변경과 적의 동태를 감시했던 조선 시대 군사·통신시설이다. 올라갔다. 조천 시내가 한눈에 보였다. 시선을 가로막은 건물은 없었다. 조천은 생각보다 컸다. 검은색, 감귤 색, 붉은색 지붕의 집들이 어깨를 맞대고 있는 마을이었다. 호텔과 빌딩이 있어 번화가 같은 느낌을 주었던 옆 동네 함덕의 영향 때문인지 이곳도 여기저기 건물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건물들은 아직 주류가 아닌 듯 조천의 지역색이 보이는 풍경을 지우진 못했다. 그것이 마음을 푸근하게 했다.
마을을 관통하는 도로를 따른 길은 다시 해안을 향해 꺾었다. 길을 조금 벗어난 곳에 커다란 현무암으로 된 시설이 보였다. ‘용천수 탐방로’라는 커다란 안내판이 나를 맞이했다. 안내도를 보니 탐방로는 물과 관련된 제주 생활 시설(남탕, 여탕, 채소를 씻는 곳, 빨래터 등)의 유적을 잇는 길이었다. 그 길은 조천을 지나는 18코스와 겹쳤다. 올레길이 먼저인지 탐방로가 먼저인지 모르지만, 두 길은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풍경만 있을 길에 역사를 입혀 올레의 내용은 다양해졌고, 역사는 걷는 이에게 자신을 드러내 우리의 기억에서 잊히지 않게 했다.
조천을 벗어나기 전까지 이런 유적지들을 계속 보게 된다. 하물며 내가 머물렀던 게스트 하우스는 ‘개낭개엉물’ 위에 세워져 있었다(개낭개는 조천포구를 말한다). ‘개낭개엉물’은 전형적인 제주의 용천수로 쓰임에 따라 위 칸은 먹는 물로, 가운데 칸은 채소를 씻을 때, 그리고 아래 칸은 빨래할 때 사용했던 곳이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아서 초록의 물이끼와 작은 게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용천수라는 단어를 보고, 용과 관련된 전설이 있는 하천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제주도는 화산섬이라 섬 전체가 물이 잘 빠지는 현무암 지반이었다. 그래서 한라산을 비롯한 높은 곳에서 흘러내린 계곡물은 지면이 아닌 땅속으로 스민다. 스민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다 해안의 절벽에서 폭포로 쏟아지거나 해수면 아래에서 솟아오른다. 그래서 사람들이 생활용수를 용천수에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용천수가 주로 분포해 있는 해안가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제주도는 용천수를‘~세미'나‘~물’로 부른다.
안내판에 ‘엉물’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용천수와 연관된 말이었다. ‘엉’은 바위를 뜻하거나 바위로 이루어진 낮은 절벽이나 바위 그늘을 의미하고, ‘~물’은 용수천을 의미하니, ‘엉물’은‘큰 바위 밑에서 용천수가 샘솟는 곳’이라는 뜻이었다.
‘용천수 탐방로’ 안내판과 대형 남탕과 여탕의 유적지를 뒤로하고 해안가 쪽으로 난 길을 걸었다. 조천항이었다. 근처에 성벽과 그 위에 있는 망루가 보였다. 성벽 밑에는 ‘금당포터’라는 작은 안내석 있었다. 읽어보니 조천은 중국의 진나라와 연관되어 있었다.
고대 전설에 나오는 금당포터. 기원전 3세기 불로장생의 선약을 구해오도록 진시황의 명령을 받은 서불 선단은 중국을 떠나 맨 처음 도착한 곳이 이 포구로 알려졌다. 다음 날 서불은 이곳에서 천기를 보고 <조천>이라는 글을 바위에 새겨 놓았다고 하며 그 바위는 고려시대 조천관 건립공사 때 매몰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순간 신기했다. 여기서 진나라라는 단어를 보는 것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단어였기 때문이었다. 현재와 진나라 사이의 시간은 너무 멀었다. 비록 고대 전설로 포장했지만, 그 먼 시간적 거리가 현재와 진나라의 만남을 비현실적으로 느끼게 했다. 그러면서 서불 선단은 왜 이곳을 맨 처음 왔는지. 이후 제주도에서의 행보는 어떠했는지 궁금했다.
‘금당포터’ 안내석이 있는 성벽은 조천진성이었다. 제주에는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해안이나 내륙 지역에 쌓은 9개의 진성이 있고, 이곳이 그중 하나였다. 안에는 높이 쌓은 축대 위에 망루가 세워져 있다. 이름이 <연북정>이었다. 유배 온 이들이 제주의 관문인 이곳에서 한양의 기쁜 소식을 기다리면서 북녘의 임금에 대한 사모의 충정을 보낸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라 한다. 올라가 봤다. 북쪽으로 나 있는 바다를 봤다. 이곳에 유배된 이가 기다린 기쁜 소식은 아마 유배의 해제였을 것이다. 유배의 해제를 위해 결정권자인 임금에게 이 망루에서 자신의 충정을 보이는 것은 너무도 필요했다. 그리고 그 충정의 모습은 임금에게 보고되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연북정>은 보이지 않는 또 다른 법정이었다. 끊임없이 자신의 충정을 증명하며 무죄를 주장하는 독백의 법정이었다. 고개를 돌리니 조천의 풍경이 잔잔하게 밀려오는 파도처럼 부드럽게 다가왔다. 검은색 톤이 전반적으로 마을을 물들였고 붉은색, 감귤 색이 간간이 점처럼 찍혀있었다. 조용했다..
<연북정>에서 내려와서 걸었다. 길은 집들 사이로 나 있고 내가 묵었던 게스트 하우스도 지나갔다. 조천초등학교 전에 감귤 색의 나무 판에 적힌 <시인의 집>이라는 글이 눈에 들어왔다. 집은 일반적인 단독주택이었다. 이곳에‘시인’이 살까? 옆에 있는 나무 판에는 ‘글 쓰는 중입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라는 글이 있어, 평소에는 개방하고 글을 쓸 때는 개방하지 않는가 보다 생각했다. 나중에 검색해 보니 여기는 북카페였다. ‘글 쓰는 중입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라는 것은 ‘close’였다. 문학적 수사였다.
<시인의 집>을 뒤로하고 걸었다. 마을이 엷어져 갔다. 엷어진 마을을 벗어나자 길은 바다를 가로질러 작은 호수를 만들고 있었다. (2024. 1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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