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5 베릿내오름

8코스 (월평아왜낭목쉼터 → 대평포구, 19.6km) 3

by 커피소년

여기부터였던 것 같다. 나는 닫혀있었다. 바다를 보고도 마음은 반응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격렬히 반응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잿빛의 바다에 마음도 물들어 반응의 색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할 수 있는 일은 앞으로 나가는 것뿐이다. 잘 정리된 공원길이었다. 나무들이 해안을 가렸다. 공원 내에 가로수인 야자수들과 돌들로 촘촘히 쌓인 방사탑이 얼핏얼핏 보였다. 앞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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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 바다로 열린 공간이 나왔다. 바다로 나가려 했으나 경고문이 걸음을 막았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곳이니 무단침입하지 말라는 경고문이었다. 여기가 ‘중문대포주상절리대’였다. 멀리 오른쪽으로 검은 절벽이 보였다. 한눈에 봐도 주상절리였다. 어떤 존재가 날이 일자인 조각도의 평 칼로 절벽의 평면을 깎고, 날이 V자인 세모 칼로 사이사이의 골을 파낸 인공적인 직사각형들이 도드라졌다. 화산 폭발로 흘러내린 용암이 바다에 다다라 식어갔다. 그 사이 내부에서는 양옆에서 수축하고 밑에서 끌어당기는 힘들이 작용했다. 그 결과 암석은 쪼개져 커다란 막대들이 줄지어 세워졌고, 저 절벽이 그 화려한 증거였다. 아마 바다로 나가려는 마음의 작용이 없었다면 주상절리대를 보지도 못하고 지나쳤을 것이다. 사람들의 염원을 담은 작은 돌탑들이 경고문을 무시하고 뒤에 정갈히 세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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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21_153625.jpg <중문대포주상절리대>

조금 더 걸어 올라가니 상점들 그리고 주차장의 큰 공간이 나타났다. 중문대포주상절리대 공원이었다. 기시감이 들었다. 정방폭포 주변과 배치와 형태가 너무 흡사했다. 입장료를 받는 것까지도. 정방폭포에서는 입장료를 내고 내려갔지만, 이번엔 물 한 모금 마시고 지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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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문대포주상절리대 공원>

코끼리 다리 같은 야자수 나무를 오른쪽으로 끼고 걸었다. 왼쪽의 낮은 울타리 너머 공원의 내부가 보였으나 일반적으로 잘 다듬어진 공원이었을 뿐이었다. 물론 공원에서 해안절벽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어 주상절리를 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공원 전에 주상절리를 본 것으로 만족했다. 공원이 끝나는 길부터 시작된 울타리에 하얀 잎들이 바닥에 어지러이 놓여 울타리의 짧은 하얀 그림자를 만들었다. 꽃과 열매들이 옹기종기 모여 열리기 때문에 다정하게 큰다는 다정큼나무였다. 꽃말도‘친밀’이다. 비에 젖어 떨어져도 끝내 그림자로 남아 친밀을 다했다.

20250521_155013.jpg <다정큼나무>


다양한 크기의 방사탑과 옹기가 있던 공원을 지나니 ‘중문주상절리대’에 대한 안내문이 나왔다.


천연기념물 제433호

절리란 지층이나 암석이 쪼개지거나 갈라져 있는 것을 말한다. 화산암에는 주상절리와 판상절리가 발달된다. 주상절리는 주로 현무암질 용암류에 형성되는 기둥 모양의 절리로서 고온의 용암이 급격히 냉각되는 과정에서 수축작용에 의해 생겨난 ‘틈’이다. 특히 이곳 절리대는 최대 높이 약 25m에 달하는 수많은 기둥 모양의 암석이 중문 해안선을 따라 약 2km에 규칙적으로 형성되어 있어 마치 신이 빚어놓은 듯한 느낌을 자아내게 하고 있으며, 약 14만 년 ~ 25만 년 전에 형성된 조면현무암으로 이루어져 학술적, 경관적 가치가 인정되어 문화재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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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문 너머로 해안선이 색달해수욕장을 품고 긴 원을 그리다 바다로 사라졌다. 해안선 너머엔 산 하나가 솟아있었다. 그곳이 낼 오를 군산이었다. 여전히 무채색이긴 했지만 바다와 하늘의 구분이 조금씩 짙어졌다. 현무암으로 조성된 검은 공원을 지나 길은 해안으로 더 이상 가지 않고 내륙으로 방향을 틀었다. 도로를 만난 길은 다시 왼쪽으로 꺾어 나아갔다. 관광지답게 넓은 도로와 잘 정비된 가로수들이 올레길을 안내하고 있었으나 비로 인해 그 모든 것은 젖어 침울해 보였다.

20250521_160351.jpg <베릿내오름으로 가는 길>

무거운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베릿내오름 입구에서였다. 이곳에서 잠시 갈등했다. 지도를 보니 이곳은 지나쳐도 상관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름에 올라, 오름의 정상을 한 바퀴 돌고, 다시 내려오는 코스이기 때문이었다. 시간도 없으니 이것은 달콤한 유혹이었다. 그래도 되도록 코스대로 걷자는 고지식한 목소리도 들렸다. 조급증 때문에 잠시 흔들렸지만 원칙을 지키기로 했다. 그래서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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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작은 원에 베릿내오름 입구로 통과해도 될 것 같았다. / 우 : 베릿내오름으로 오르는 계단>
20250521_160807.jpg <베릿내오름 입구에 설치된 중문마을 10경 안내문>

계단에는 우비를 입은 커플이 셀카봉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고, 더 위쪽엔 우산을 쓴 이들이 내려오고 있다. 난간에 서 있는 작은 간세가 베릿내의 뜻을 알려주었다.


천제연의 깊은 골짜기 사이로 은하수처럼 물이 흐른다고 해서 성천(星川), 별이 내린 내(별빛이 비치는 개울)라고 부르던 것이 베릿내가 되었다.


생각보다 이름의 뜻이 예뻤다. 별이 내린 내라니. 그러나 예쁜 이곳에서 나는 마음이 급했다. 빨리 끝내고 싶어 서둘러 걸었다. 시간을 쥐어짜고 있었다. 전망대에서조차 나는 바다 쪽만 보고 바로 빠른 걸음으로 내달렸다. 내륙 쪽을 보진 못했다. 베릿내오름에는 굼부리, 즉 분화구가 있다. 둥근 것이 아니라 동북쪽은 터진 분화구였다. 이것을 보라고 전망대가 있었던 것 같다. 다만 그곳을 지나며 희미하게 본 것이 있었다. 분명 아주 낮은 경사였고 산담이 보였고, 그 안엔 무덤들과 비석들이 있었다. 왠지 낯설었다. 이곳이 분화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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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릿내오름 오르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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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전망대에서 본 풍경 / 우 : 걸으며 본 분화구쪽 풍경, 무덤과 비석이 있는산담이 보인다>

광명사를 끼고 되돌아 한 바퀴를 돌아 내려올 때 걸음이 멈췄다. 계단 끝에 하늘과 바다가 구분 안 되는 하늘바다가 있었다. 계단과 하늘바다 사이는 생략되어 둘은 바로 이어졌다. 계단 끝에서 한 발만 내디디면 하늘바다로 바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였다. 유사 가능성 때문인지 닫힌 마음에 박하사탕의 시원하고 싸한 맛이 퍼졌다. 마음 한편에 숨겨둔 방의 문도 열렸다. 그러나 시원함이 지나자 조용히 아려왔다. 문은 열렸어도 마음 밖으로 나오지 못하기에 그랬다. 한 발이었다. 한 발만 내디디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한 발은 끝내 하늘바다에 닿지 못한다. 그걸 알기에 알알했다. 다시 방문은 닫혔다. 잠시 눈이 흐렸다. 생각의 가지가 더 뻗지 못하게 빨리 걸었다. 아래로 계단이 점점 보이자 하늘바다는 멀어졌다. 도로가 보이고 포구도 보이고 접힌 듯한 바다와 하늘, 그리고 검은 새 한 마리가 날고 있었다. 현실 세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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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명사와 천제사>
20250521_163028.jpg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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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풍경>


계단을 다 내려와 오른쪽으로 꺾었다. 역시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었다. 계단 끝에 예전엔 베릿내라 불렸던, 3개의 천제연 폭포를 지나는 중문천이 흘렀다. 참고로 한라산에서 발원한 폭포인 천제연은 하늘 천제의 연못으로, 선녀가 노닐 만큼 물이 맑고 경치가 빼어나서 붙여진 이름이다. 별빛이 비친다(베릿내)는 수면은 별빛 대신 주변 녹음이 풀어져 짙은 수채화를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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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임교와 중문천>

중문천을 가로지르는 선임교라는 구름다리를 건넜다. 베릿내공원이었다. 이곳에서 중간스탬프를 찍었다. 정자에서 잠시 쉬며 에너지바 하나를 먹고 물을 마셨다. 군용 우의를 입는 젊은 남자가 내가 가야 할 길에서 내려와 스탬프를 찍고 다시 올라갔다. 8코스에서 처음 본 올레 순례자였다. 그런데 스탬프만 찍고 되돌아갔다. 원래는 내가 지나온 길을 그는 가야 했다. 뭐지?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를 뒤따라 걸었다. 우의를 입었다는 것은 그도 나처럼 걸었다는 것인데, 왜 역방향으로 더 걷지 않고 되돌아가는 것일까? 중간스탬프만 필요한 어떤 사정이 있을 것이다. 판단은 금물이다. 어느새 길은 중문천의 또 다른 이름이었던, 은하수처럼 물이 흐른다는 성천(星川)이라는 이름을 지닌 성천 포구에 다다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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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스탬프와 베릿내오름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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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천포구 가는 길>
20250521_164428.jpg <성천포구>

포구에서 그를 앞질렀다. 나무 계단을 올라 언덕에서 포구를 다시 봤다. 요트 계류장이 있어서인지 요트들이 정박해 있다. 그는 요트 계류장을 지나고 있었다. 내가 앞질러 가고 여기까지 올라오는 동안 그는 무엇을 해서 이렇게 늦었을까? 앞지르고 나서 얼핏 그를 봤을 때 그는 경로를 벗어나 사진을 찍고 있었던 것 같다. 짧은 거리였지만 그에게서 속박되지 않는 나와 대비되는 어떤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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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본 성천포구, 요트계류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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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달해수욕장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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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화살표 반대로 가야 해수욕장으로 갈 수 있었다>

그를 남겨두고 걸었다. 바다를 배경으로 한 포토존이 있었으나 포토존을 주인공으로 찍고 지나갔다. 중문관광단지라 그런지, 사람의 눈을 사로잡는 다양한 매력의 상점들이 많았다. 비로 인해 카카오맵을 보지 않고 파란 화살표만 찾아 걸었다. 주차장으로 갔다 나무 사이로 가서 중문색달 해수욕장이라는 안내석을 보았다. 색달해수욕장으로 가나 보다 했다. 파란 화살표가 나무테크 길을 가리켰다. 걸으니 숲길이어서 해수욕장과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카페오션이라는 카페에서 확실히 알았다. 해수욕장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되돌아갈 수도 없다는 것을. 실망감이 그리고 낭패감이 밀려왔다. 모래밭을 걷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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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화살표 왼쪽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었는데 그곳에 해수욕장으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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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수욕장을 지나쳤다고 느낀 순간들>

(2025.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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